부산 여행기
어디서 듣고 꽂힌 말인가 했더니 에어비앤비 캐치프레이즈였다. 여행은 살아 보는 거야.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현지인의 집에 머물며, 그 동네의 맛집을 발견하고 천천히 문화를 즐기는 그런 여행을 추구하는 브랜드 캠페인. 이상하게 그 문장이 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정확한 뜻은 모른 채 어느 한편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무의식 속의 그 문장을 꺼내어 부산을 살아 보는 중이다.
너저분한 생각들이 많아서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내 마음이 늘 있지 않던 곳에 있으니 몸도 있지 않던 곳에 두고 싶었다. 고민 없이 목, 금 연차를 쓰고 홀로 부산에 내려왔다. 고민할 시간까지도 자유로운 게 또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에어비앤비를 쭉 내리다 보인 숙소를 바로 예약했다. '다른 숙소와 다르게 가정집 같은 느낌이었다'는 후기에 꽂혀서. 이곳에 가면 부산에 살 수 있겠구나. 살아 보는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듣던 대로 숙소는 가정집 같았다. 빌라 꼭대기 층,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롤 스크린과 예쁜 테라스,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작은 방, 정갈하게 정리된 부엌, 아늑한 안방. 바로 앞에 온천천이 흐르고 있었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면 강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졸하고 났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 배가 고팠다. 평소 같았음 꼭 가야 할 맛집 리스트 검색을 열심히 돌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근처 카페를 찾았다. 부산대 근방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샐러드드레싱이 매우 짰고, 특별한 맛도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맛이 어떻다 말할 필요도 없었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서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었으니. 접시를 치우면서 생각 정리를 시작했다. 저번 주까지는 내 힘든 마음을 인정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이번 주에는 어떻게 해야 현재의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계획했다.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꽤 큰 수확이었다.
노트 위에 펜을 도르르 굴리다 문득 운동을 가고 싶어 졌다. 서울에서 늘 지키던 패턴.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운동 가기. 그걸 부산에서도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의 회원권을 부산에서도 쓸 수 있음을 알았고, 나는 혹시 몰라 챙겨 놓은 운동복을 챙겨 서면점의 헬스장으로 갔다. 우리 지점과는 다르게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많았냐면, 프리 웨이트에도 웨이팅이 있었다. 근육 빵빵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기구 사용도 빠릿빠릿하게 하고 피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쉬는 시간 없다시피 가지면서 빡세게 운동했다. 허벅지 단단해져서 나오니 꼭 공부 마치고 운동까지 싹 한 다음 집에 가는 부산대생이 된 기분이었다. 여행 온 사람인 티 안 났을 것 같아 짜릿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배달의 민족으로 딱새우회를 시켰다. 주소 입력 창에 게스트하우스 주소를 입력하는데 꼭 내 집 주소를 입력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집어 들었다. 봉지 없이 들고 온 맥주의 찬기가 좋았다. 바람도 걸맞게 선선했다.
내가 좋아하는 바디워시를 챙겼다. 러쉬 올리브 브랜치.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나와 난방 빵빵하게 돌린 안방 침대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티브이로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틀고, 맥주와 딱새우회를 먹기 시작했다. 맥주 한 캔을 빠르게 비웠다. 알딸딸해져서 침대에 누웠다. 정우성이 손예진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드는 장면을 보며 혼잣말로 좋겠네, 했다. 연애 세포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저런 것 때문에 연애했었지, 맞다 맞다. 그렇다고 외롭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화가 끝나니 술도 깨서 음식을 치웠다. 테라스에 비치된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다. 테라스의 공기는 바깥공기를 닮아 낮엔 덥고, 밤엔 추웠다. 찬 공기를 맞으니 맥주를 사 들고 올 때의 선선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집 앞의 온천천을 걸어야겠구나. 옷을 챙겼다. 새벽이었다.
새벽에는 몇 명이나 이곳을 걸을지 궁금했다. 삼십 분에 한 명 꼴로 사람이 보였다. 대부분 혼자 걷는 사람들. 나처럼 생각하며 걷고 있을까, 생각을 덜기 위해 나왔을까, 아님 야근 후 퇴근길이었을까. 물 가까이에서 걷는 게 좋은 나는 물을 바로 옆에 끼고 걸었다. 보글보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곳에서는 더 천천히 걸었다. 긴 부리와 얇고 긴 다리의 새를 보았다. 앞에만 보고 있는 게 날 닮았네. 쟤는 무슨 새일까. 왜 잠도 안 자고 앞만 보고 있을까. 작고 노란 꽃이 보였다. 유채꽃이 만발했다던데, 한두 송이 피어 있는 얘도 유채꽃일까? 꽃 이름은 참 모르지만 깜깜하니 노란색이 덜 빛나는 건 알겠다. 역 한 개를 지나쳤다. 임상아의 뮤지컬을 틀었다. 가사가 내 마음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투 스텝으로 걸었다.
내 삶을 그냥 내버려 둬 더 이상 간섭하지 마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상으로
난 다시 태어나려 해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아 음악과 춤이 있다면
난 이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날개를 펴는 거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돼야만 해
이젠 알아 진정 나의 인생은 진한 리듬 그 속에
언제나 내가 있다는 그것
나 또다시 삶을 택한다 해도 후회 없어
음악과 함께 가는 곳은 어디라도 좋아
또 다른 길을 가고 싶어 내 속의 다른 날 찾아
저 세상의 끝엔 뭐가 있는지 더 멀리 오를 거야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진 않아
하루아침에 부산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틀처럼 산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웠다. 밀린 메시지 몇 개에 답장을 했다. 어떻게 보내고 있냐는 물음에 이방인이 된 나를 즐기고 있다 했다. 자랑할 만한 인스타 갬성 사진 같은 것 없이도 마음이 꽉 차오른 채 자랑했다. 나 오늘 여기서 운동도 다녀왔잖어. 새벽에 산책했는데 너무 좋더라. 내 머릿속의 지우개 보면서 맥주 마셨어.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할 때 예진 언니랑 같이 짠 했다. 맥주 마셨으니까 아침 운동도 가려고. 호기롭게 다짐하며 금세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에 걸었던 온천천을 뛰었다. 조깅은 또 처음이었다.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가슴 벅찬 그 기분을 즐긴다던데, 역시 쪼렙이라 그렇게까지 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뛰다 걷다 했다. 그래도 또 뛰기는 뛰었다고 어제는 한 개만 지나쳤던 역을 두 개나 지나쳤다. 동래역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한두 송이 피어 있는 걸로는 저게 유채꽃일까 싶었는데 만발해 있는 것을 보니 유채꽃이라는 걸 알았다. 꿀 빨고 다니는 벌의 토실한 궁둥이가 귀여웠다. 벌은 나비보다 몸이 덜 빨랐고, 나처럼 가만히 벌과 꽃과 물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은 없으면서 옷을 입고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고양이도 봤다. 그 옷은 대체 누가 입혀 준 걸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고양이를 몇이나 알까.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 뒤로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정리해야 할 다른 하나의 생각도 남아 있었다. 만날 사람이 생기고, 일정이 생기자 모두 작정한 듯 사색할 시간을 빼앗기 시작했다. 이튿날에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챙겼는데 흐리기만 하고 비는 또 안 왔다. 해가 구름 뒤로 숨었을 때, 그때부터는 흐린 부산을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