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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pr 24. 2021

2021, 부산 (2)

부산 여행기

  정리해야 할 너저분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함이 이번 여행의 목표였지만, 여행의 동기는 한 친구에게 있었다. 부산에 사는 친구. 심해를 닮아 속이 깜깜한 친구. 그 친구는 나를 윤슬이라 불렀고, 나는 친구를 심해라 칭했다. 문득 보고 싶던 날에 네가 보고 싶다 하니 자기를 보러 내려와 달라고 그랬다. 오월인 내 생일을 미리 축하해 주겠다고. 택배로 선물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얼굴 보고 싶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부산 가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 없다 그랬다. 그렇게 부산에 왔다.


  심해를 만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마음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음에도 정리해야만 할 것 같은 일, 문제라 칭해야 할지도 고민이 되는 일. 고민하기 위해 카페에 앉자마자 고민하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마치 내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친구는 전화로 울었다. 내 마음이 걱정되어 전화했다고 그랬다. 평소와 같은 배려 묻은 통화였다. 그래서 더 슬펐다. 정리되지 못한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랬다. 당장 결론을 지어야 할 것 같고,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지만 아직 나는 정리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친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 그랬다.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랬다. 눈물 고인 채로 전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다.


  심해의 생일 즈음에 카드를 한 장 써 줬었다. 카드 위에 내가 쓰는 향수를 뿌려 줬다. 심해는 그 카드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몇 번 했었다. 향이 다 날아갈 법도 한데 아직도 난다고, 원래 종이가 머금고 있던 향 같다고. 나는 만날 때마다 그 향기가 나는 카드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눈물의 통화를 마치고도 꾸역꾸역 펜을 잡았다. 우울한 마음에 우울한 문장들이 써질 것 같았지만, 거르고 걸러 행복을 비는 마음만 꾹꾹 담았다. 사월 내내 사월의 사를 죽을 사로 표현하던 심해가 걸렸다. 카드 말미에 책에서 본 행복의 요령을 적었다.


요컨대 행복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폭넓은 관심을 가질 것.
둘째,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보다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것.


  만나기로 한 곳은 서면 골목에 위치한 예쁜 음식점이었다. 깜깜한 조명이 예뻤고, 친절한 직원이 있었다.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심해에게 인사했다. 안녕. 한 달 전과 그대로였다. 우리는 파스타와 리소토, 하우스 와인 두 잔을 시켰다. 직원 분께서 와인 종류를 열심히 설명해 주셨는데, 칠레가 어떻고 뭐가 저쩧고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몇 가지 선택지 중 어제 들어왔다는 청포도 향의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먹자마자 둘 다 눈이 동그래졌다. 개맛있는데? 진심 뻥 안 치고 내가 먹었던 와인 중에 제일 맛있어. 음식 나오기 전에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길래 그럼 얼른 마시고 한 잔 더 시키자고 그랬다. 둘 중 누구 하나가 뭐 하자고 하면 바로 실현되었다. 나는 우리의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들이 좋았다. 같은 와인을 두 잔 마셨다. 서비스 크래커도 받았다. 서비스를 받을 때 와인 이름을 여쭈었다. 너무 맛있어요, 하는 애 앞에서 나는 또 진짜 맛있어요, 하고. 금주 깨고 마시는 술이라더니 볼이 빨간 게 보였다. 선물이라며 준 시집은 견주 마음을 관통한 멍멍이 시집이었고, 나릿나릿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나 아까 기분 너무 안 좋았는데 기분 좋아졌어, 너 술 마셔서 그러지, 그런 말들을 했다.


  발걸음에 기분이 묻어 있었다. 신이 난 채 골목을 누볐다. 나를 데리고 오고 싶었다던 카페에 갔다. 숲 속 같은 초록빛의 카페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을 두 개나 추가하는 애를 두고 그러다 너 죽어, 추가할 거면 한 번만 해, 하고 걱정했다. 그래도 걔는 굳이 굳이 두 번 추가했다. 위 걸레짝이라더니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나란히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옆에 앉은 애 생각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 너는 예민한 촉각을 가졌다는 것, 컵 표면의 촉감을 자세히 느낄 줄 안다는 것, 연기와 춤을 배웠다는 것,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려 한다는 것, 주변 사람들이 너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것, 학창 시절 때에는 너를 이유 없이 미워하던 아이가 있었다는 것, 날 옆에서 보니 또 다르다 그런 것, 내 귓바퀴에 빨간색 피어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 것.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았다. 하던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또 네가 궁금하다고 질문했고, 너는 계속 꺼내 줬다.


  너의 집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집이었다. 현관문까지 가는 길이 매우 복잡했고, 만일 내가 이곳에 산다면 매일 길을 잃을 것 같았고, 상상했던 것과 반대로 너는 진퉁 맥시멀리스트였다. 있어야 할 자리에 뭐가 없어서 찾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두 번인가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됐다. 그런데도 모든 공간에 나름의 규칙성이 있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었다. 귀여운 고양이도 네 마리, 여기저기에 각각이 편히 쉬는 자리가 있었고, 침대맡에 놓인 액상형 제산제는 누워 있다 속 쓰릴 때 먹는다 그랬고. 그걸 자기 츄르라고 그러지 말고 일단 카페인부터 좀 줄이면 좋을 텐데. 책상 위에 있는 저것들도 다 저기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냐 물으니 책상을 정리해야겠다 하고 몇 개 좀 치우는 것 같더니만 너는 앉아서 갑자기 음악을 틀고 글을 쓰고. 비슷한 음악 추천해 줄까? 하니 이따가, 하고. 나는 샐쭉 웃으며 기다렸고, 너는 금방 쓴 글을 읽어 줬고. 해석의 여지가 많아서 좋은 글임을 너도 알고 있었다. 타자 치는 소리가 빗소리 같아서 좋았다. 그대로 네게 전했다.


  속이 잘 보이지 않던 네 속을 많이 보았다. 내가 음악을 던져 주면 너는 그걸로 글을 썼었다. 음악 하나 던졌다가 글 쓸 강박을 만들까 봐 주고 싶던 음악을 꼭꼭 아껴 뒀다 주기도 했었는데. 보내 주는 글이 항상 심상치 않길래 나는 네가 작가 지망생인 줄 알았다. 글은 너의 수많은 취미 중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이 많았고, 취미 생활도 참 다양했다. 너는 보여 주는 것에 능했다. 부끄러움 하나 없이 적은 글을 보여 주고, 만들었던 음악을 들려주고, 썼던 편지를 읽어 주고, 갤러리 속 사진들을 보여 주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를 지나쳐 간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쉴 틈 없이 재미있는 일들을 벌이며 살았다. 그런데도 너는 삶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꼭 살아야만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이유가 있어야만 사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런 게 있었나. 살아지니까 안 살 이유가 없는 것이지만, 무엇이 나를 살게 하지.


  밤늦게 들이켠 카페인은 우리 둘을 오래도 붙잡아 뒀고, 너는 오 분 내로 잠 못 들면 피아노 치러 가자 그랬다. 당연히 잠들지 않았다. 발 디딜 틈 없는 방바닥을 조심조심 누르며 피아노 앞에 앉았고, 너는 건반을 꾹꾹 눌렀다. 새끼손가락에 힘 열심히 주며 사과 한 개를 네 개로 쪼개 연습했을 꼬마가 보였다. 그 옆에 연습하지도 않고 사과를 칠하는 내가 앉았다. 네가 만든 선율에 맞추어 나는 높은 건반을 누르고, 바흐는 참 바흐 같은 곡을 썼다는 소리를 했다가, 콩쿠르에서 쳤던 소나티네를 쳤다가, 일곱 시 반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같이 잠들었다. 중간에 깼을 때에 네가 내 몸에 팔을 둘렀다. 나는 그 무게감이 좋았다. 꿈인 줄 알았다. 모든 게 꿈결 같은 흐름이었다. 다시 깨어서도 너는 팔을 둘렀다. 원래 내 위에 있어야 할 팔인 것처럼 안락했다. 맑게 갠 한낮이었다. 흐릴 이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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