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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May 02. 2021

2021, 부산 (3)

부산 여행기

  우리는 해가 중천에 솟았을 때 겨우 일어났다. 너는 침대에서 두 걸음이면 도착하는 작은 텃밭의 식물들에 물을 줬다. 옹기종기 야무지게도 심어 놨지만 어디에 뭘 심었는지는 또 모르고 있었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물을 휘휘 뿌렸다. 언젠가 식물 잘 기르는 요령을 물었을 때 너는 무관심이 답이라더니 모닝 루틴처럼 식물들 밥은 또 꼬박 잘 챙겨 주더라. 무관심스러운 표정에 그렇지 못한 행동이 요령이었던 걸까. 내가 네 텃밭에 사는 새싹이었다면 움틀 때부터 자랄 때까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을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새싹들은 다소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잘 자라고 있었다. 아날로그만 사랑할 것 같았던 너는 AI 스피커를 두 대나 가지고 있었고, 텃밭에 물 주기가 끝나자마자 "헤이 카카오, 클래식 틀어 줘." 했고, 거실로 나갔고. 아무튼 웃기는 애야, 속으로 생각하며 침대를 뒹구는 사이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점심으로 토마토와 새우를 곁들인 오일파스타를 내어 줬다. 나름 면도 돌돌 말아 플레이팅, 방금 물을 줬던 미니 텃밭에서 이름 모를 풀도 따 와 장식했고. 음식 솜씨는 또 제법이었다.


  애정 가득 담긴 음식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운 우리는 서면의 작은 전시관을 찾았다. 전시 이름은 파랑새, 어떤 내용의 전시인지는 둘 다 모름. 하루를 늦게 시작한 탓에 마감 시간에 임박해 손님도 없었다. 팸플릿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걸음이 느린 널 따라 걸으며 천천히 관람을 시작했다.


  행복을 찾아가는 내용의 전시였다. 파란 벽에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각 공간마다 저마다의 행복의 방식이 적혀 있었고,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에는 행복을 묻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


원하는 걸 가짐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어딘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나요?


  문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네게 같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어딘가 있을까. 네 대답은 글쎄, 내 대답도 글쎄.


  문을 몇 개나 넘었을까. 어떤 방에는 관람객들이 언제 가장 행복한지 직접 적어 볼 수 있는 책 몇 권과 펜이 있었다. 나는 네가 펜을 잡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했을까. 근래 자주 자문하던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의 행복으로 살아가지. 언제가 행복했더라. 답을 구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은 언제 가장 행복할지 책장을 넘겨 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은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을 쓰지 않았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너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적었다. 너 또한 그랬다.


  작은 새장과 큰 새장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서 너는 울었다. 작은 새장에 머리를 넣어 보더니 들어 본 적 없던 겁에 질린 목소리로 기분이 이상하다 그랬다. 나도 널 따라 머리를 넣어 봤다. 갑갑했다. 철창과 시야가 너무 가까워 어디 도망가지 못하고 한 치 앞만 봐야 하는 내가 떠올랐다.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는 훌쩍였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음 방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에는 행복은 일상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 주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천천히 뒤따라온 네게 나는 어느 그림이 가장 행복해 보이냐 물었고, 너는 그런 그림은 없다고 답했다.


  전시 관람이 끝나자마자 너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부끄럼 없이 단숨에 적어 내어 보여 줬다.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이 목표가 되는 것이라는 말은, 어제 새벽까지만 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어. 새장에 머리를 넣고 딱딱한 철창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보니 새장은 내가 여태 만들었던 틀이었다는 것을 알았어. …… 나는 결국 내가 만든 틀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거야. 자유롭게 나는 방법을 몰라서 숱한 취미들을 만들며 딜레마에 빠졌었지만 나는 새장 밖을 갈망하는 파랑새였구나. 그런 사실을 깨달으니 자꾸만 새장에 머리를 찧고 있던 내가 떠올라서 눈물이 났어. …… 그런데 네가 어떤 사진이 제일 행복하게 보이냐는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액자들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소중하다는 말로 부족한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사는 이유가 없다던 너는 새장 안에서 깨달았다. 사는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틀이었음을. 너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그랬다. 나는 너만큼 자유롭게 느껴진 사람이 없었다 그랬다. 너는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말을 줄였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몇 초간 흘렀고, 우리는 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만끽했다. 함께 있는 그 시간 외에는 더한 행복이 없었으니.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의 존재를 믿냐는 전시의 질문에 믿지도, 찾지도 않는다 생각했다. 행복은 어느 순간으로 우리 안에 존재했기에. 지금처럼 찾으려 하지 않아도 존재할 것이라 믿었기에.



  부산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속에서 꽃이 피고 덩굴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이도 새들에게 쓸모 있는 숲이 되었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이룬 이 숲에서 행복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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