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의 <심신 단련>을 구매해 읽고 있다. 133페이지에 나오는 곽 선생님의 질문들에 작가는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십사 년을 살아오는 동안 누구도 이렇게 고급스러운 것들을 물어본 적 없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러하여 아침부터 대뜸 자리를 펴고 앉아 책에 쓰인 질문들에 답해 본다.
내적 동기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럴싸해 보이는 일들에 관심이 많았고 칭찬을 동기로 살아왔다. 그래서 내 꿈은 이유 없이 간호사였다가 글로 상을 많이 받길래 작가였다가 학급에 내가 쓴 소설을 돌려 읽히면서 소설 작가였다가 영어로 전교 1등을 찍어 봤다는 이유로 동시통역사였다가 엄마가 안정적인 직업을 권유해서 약사였기도 했다. 좀 잘하나 싶으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금방 기가 꺾였다. 오기로 버텨 보면 좋으련만 포기를 먼저 배운 탓인지 뒷심 부족하게 자랐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도 안 되고 작가도 안 되고 동시통역사도 안 되고 약사도 안 되고 이건 그나마 조금 더 나은가 싶었던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많고, 나는 오기가 부족하다.
평화와 균형을 찾아서. 뭐 하나가 괜찮아지면 안 괜찮은 구석을 자꾸만 찾는다. 부족한 것 같아서 채우고 나면 아직도 부족한 것 같고 나중에는 너무 과하지 않았나 고민한다. 그런 고민들 사이의 균형을 찾아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지혜와 사랑. 어느 것이든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일지 모색하고 경계 없이 사랑을 나누어 주려 한다. 잘 아는 사람이든, 잘 모르는 사람이든.
티는 내지 않지만 의심하는 것들이 많아 무엇이든 100 퍼센트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마음에 남는 것들을 믿고 내 감정을 믿는다. 좋았든 나빴든 마음에 남고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면 남아 있는 그것을 믿는다. 나중에는 바래질 기억이라도 바래진 대로 믿는다.
소중하다 말하기에는 먼지 쌓이게 두기도 하고 구겨지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들을 소중히 여긴다. <심신 단련> 사이에는 부산에서 날아온 편지가 봉투 채로 끼어 있다. 책갈피를 대신하기도 하고 책 한 번 읽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도록.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기에는 행동이 따라 주지 못하는 것 같고 이 안에 담긴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사람 한 명. 웬만하면 좋은 것만 남기는 내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했었는데, 미운 마음을 풀어쓰고 나니 이제는 또 그다지 밉지 않다. 하나하나 짚어 생각하면 다시금 미워지고 싫어지겠지만 그렇게까지 미워하기 너무 귀찮고 이미 바쁘다.
자타공인 눈물 없는 내가 최근에 울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첫째로는 아빠의 건강이었고 둘째로는 약해진 채로 봤던 뮤지컬이었다. 약한 마음에 마주하는 슬프거나 따뜻한 것들은 나를 잘 울게 한다.
너와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밤에 대화를 나누었지만 미래를 떠올리면 어둠보다 환한 빛이 떠오르지 과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거나 서로의 눈을 감겨 주겠지 서로의 미래가 놀랍도록 닮았다는 걸 알게 되면 나는 너에게서 어떤 슬픔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너도 나에게서 같은 것을 보게 될 거야 네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면 나는 너의 귓가에 속삭이고 잔잔한 파도소리, 따갑지 않은 햇빛, 움켜쥔 주먹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 너는 해변에 무언가를 적겠지만 내게 보여 주지 않고 우리는 음악에 가까워지겠지 어쩌면 필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무엇으로든 불려도 좋을 거야, 이름을 잃고, 장르를 잃고, 목소리를 잃고, 끝내 마음을 잃었다는 착각을 하게 될 거야 서로의 착각이 놀랍도록 같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너지는 모래성을 바라보고 갑작스럽게 증발하는 바다, 해변이 좁아지고 좁아지고 좁아지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나면 해변이 아니라 너의 두 팔에 안겨 있겠지 영원토록 한낮 속에 머물지 못하고, 해변이 끝나고, 음악이 멈추고, 영화가 끝난다면 밤이라는 걸 깨닫고 우리는 죽어 있을 시간보다 살아 있을 시간이 더 오래되길 바랄 거야 슬픔을 감각할 수도 없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골몰하게 될 거야 만약 우리,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마음을 겹칠 수 있다면, 우리가 같은 장르로 묶인다면, 서로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본다면, 그때서야 나는 네가 모래 위에 적었던 문장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안녕, 너는 그곳이 미래인 줄도 모르고 내게 인사를 건네겠지 빛으로 축조된 성, 그 한가운데 서서
양안다, 밝은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