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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May 08. 2022

2022, 강릉

아란과 시간의 속력을 가늠하며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 빨리 갔으면 좋겠어?

  ⎯나는 빠르게 갔으면 좋겠어. 얼른 서른다섯 살이 됐으면 좋겠거든.

  ⎯서른다섯? 왜?

  ⎯그때면 많은 것들이 안정적일 것 같아서. 


  연휴로 몰린 인파 탓에 계획했던 전시회를 포기하고 카페에 갔다. 아란은 볕이 뒤로 드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아란 뒤편의 초록 잎에 반사된 빛을 통해 천천히 해가 지는 것을 구경했다. 여행할 날보다 돌아갈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벌써 내일이면 돌아갈 때네, 시간이 빠르네, 의미 없고 당연한 말을 괜히 돌아가면서 하고, 둘 중 한 명의 말이 끊기면 나는 물었다. 아란이 원하는 시간의 속력은 어때.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란에게 이런 것들을 자주 묻게 됐다.


  서른이면 많은 것들이 안정적이어야 할 것 같았는데 아직 너무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서른이기 전과 달라진 게 너무 없어서. 서른다섯이면 분명 많은 게 변했을 거고 많은 것들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하루하루의 재미만을 좇으며 사는 건 그만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아란은 오 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서른이 안정적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던 것처럼 서른다섯이라고 과연 또 안정적일까. 그런 물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누르고 말했다.


  ⎯오 년 전의 아란과 현재의 아란도 많은 것이 바뀌었지. 오 년 뒤의 아란이라면 정말로 안정적인 사람이 될지도 몰라. 어떤 모습이 될지 나도 궁금하다. 오 년 전과 지금은 어떤 게 가장 달라진 것 같아?

  ⎯겁이 많아졌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하던 때랑 다르게. 작년의 나만 해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


  그런 시기가 있다더라, 하고 넘기는 아란 앞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흐르는 마음을 쏟아내지 않고 흘려보내는 사람들이니까. 흐르는 마음속, 사 년 간 봐 온 아란의 모습 중 가장 묵직한 무게감을 느꼈다. 정제된 깊은 마음을 보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괜한 말로 첨언하지 않고 그 마음을 아껴 주고 싶어서. 조용히 나의 오 년 전에 대해 생각했다. 아란과 반대였다. 오 년 전의 나는 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고, 지금의 나는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일단 덤벼 보니까. 반대 방향으로 일차원을 주행하는 것 같았다.


  ⎯그럼 채윤은 어때.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 빨리 갔으면 좋겠어?

  ⎯나는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 끝나는 것들이 무서워.

  ⎯그래도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잖아.

  ⎯그렇다 해도 나는 끝 뒤의 시작을 기대하기 전에 버텨야 할 시작 앞의 끝이 무서워.


  스물여덟에도 아빠가 살아 있을까, 서른에도 아란과 여행할 수 있을까, 서른다섯에도 우리 강아지가 건강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시간을 멈춰 두고 싶어서. 나보다도 나를 둘러싼 것들이 달라질 게 무서워서. 느낄 수 있을 때 더 만끽하고 싶어서. 함께할 수 있을 때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이미 보냈던 시간도 다시 보내고 싶어서. 버렸던 시간도 줍고 다시 쓰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란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구나, 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만 이야기하고 속마음을 느끼니까.


  아란에게 미리 받은 생일 편지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다른 점도 많지만 결국엔 비슷한 나와 친할 수 있어서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고. 아란이 좋아하는 다정과 배려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아란이 좋아하는 책을 다른 생각으로 이해하고 이야기해 줘서 재미있다고. 우리는 삶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해졌고 지금은 닮은 모양에 다른 속을 채워 가고 있다. 많은 것을 안정 궤도에 놓고 싶어 하고, 많은 것을 멈추어 두고 싶어 하고, 당연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우리가 강릉에 머무는 사흘 동안 이야기한 많은 과거와 미래. 쉬웠던 것들을 쉽게 하지 못하게 되고, 쉽지 않았던 것들을 쉽게 하게 되고, 언제 이렇게 우리가 달라졌지 헤아려 보게 되고. 강릉은 모든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기 충분한 도시였다. 그게 느리든, 빠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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