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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Oct 20. 2024

상담 일지: 1-2회기

나는 가끔 고철 덩어리 같고 오래전부터 내 안의 어떤 부분이 고장 나 부식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 따위로 마무리하게 되는 일기처럼 매일을 별일 없이 살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크게 마음이 휘청였고 나를 짓누르고 있는 사건들이, 나를 산산조각 낸 경험들이 떠올랐다. 전세 사기, 희망퇴직, 그리고 아버지의 사망. 나를 지나쳐 간 사람들. 혼자만의 영원을 향한 약속과 재가 되어 버리는 관계들. 시간을 약으로 삼아 나아지길 기다린다면 이 모든 게 나아질까? 그것은 진정한 치유일까? 진정한 치유라는 게 있긴 할까? 나는 나를 잘 보듬으며 살고 있는 걸까? 힘듦을 덮어 두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것들이 궁금해진 나는 서울시 마음건강 지원 사업에 신청했고, 참여자로 선정되어 총 6회의 상담을 지원받게 되었다.


상담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상담 시간에 나누게 될 이야기가 미리 정해져 있고 물꼬를 터 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담 선생님께서는 첫 회기부터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물어보셨다. 먼저 내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몇 초간 얼탔고, 이에 선생님은 다시 물으셨다. 요즘 내담자님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데'였기 때문에. 힘든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상황들이 너무 많았어서 상담은 신청했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힘듦은 없는 상황. 무릇 힘든 사람이라면 매일을 눈물로 지새우고 갑자기 호흡이 빨라진다든가 아무것도 집중을 못 한다든가 위장 장애가 생겨야 할 것 같은데(실제로 내가 그랬던 적이 있으니), 요즈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걱정을 제쳐두고 당장 앞에 있는 행복만 거머쥐며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힘든지는 모르겠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에는 대답할 만한 게 잘 없었다. 힘듦을 쥐어짜는 기분으로 말했다.


요즘은 전세 사기 때문에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그게 좀 힘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어떻게든 잘 살고 싶었는데, 피해자에게 승산이 없는 게임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삶이 무기력해졌어요. 살면서 해 보고 싶던 것도 거의 다 하면서 산 것 같으니 당장 죽게 돼도 크게 아쉬움이 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 죽고 싶단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하면서 떠올렸다. 당장 죽게 돼도 크게 아쉬움이 없겠다는 생각을 봄부터 했었지. 초여름에는 그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를 제한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아 버렸고.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꼭 나가던 운동은 아예 안 나갔고, 생각 없이 막 먹었고, 며칠은 또 굶기도 했고, 술은 속 뒤집어질 때까지 마셨지. 나를 해하는 방식으로 당일에 타투를 예약했고. 정해 둔 도안도 없이 마음대로 해 달라고 그랬고. 몸에 칼을 긋는 행위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많이 망가져 있었지.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떠올렸지. 모든 기대가 소멸되는 기분이었지.


그렇게 가장 기대 없던 한여름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 한 명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듯. 그 사람 한 명으로 순식간에 많은 구멍이 메워졌다. 나의 모든 슬픔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랑을 방패처럼 세워 줘서 힘듦을 뒤로하게 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제는, 당장 죽게 되면 아쉬울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이 사람과의 미래가 사라지고, 내가 사라져서 이 사람이 슬플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어떻게든 삶을 부여잡고 살고 싶다. 그런데도 상담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일단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말을 했다. 꼭 아파야 할 것만 같았다.


상담은 계속 삐걱거렸다. 슬픈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슬픈지 모르겠고, 그러니 묻는 말에 대답밖에 못 하겠고. 상담 선생님은 원래 말이 없는 편인가요? 물으시고. 나 그래도 묻는 말에 대답 잘하면서 상담 잘 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잘못하고 있는 건가. 말이 없으면 안 되는데 말이 없어서 잘못한 기분이 들고. 채윤이 너는 왜 그렇게 네 얘기를 안 해? 나는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언제는 나처럼 솔직한 사람 없다더니, 늘 내 마음 설명하며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답답해하며 나를 떠나갔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갈수록 함구하게 됐다.


제가 낯도 많이 가리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요, 제가 제 이야기를 잘할 수 있게끔 많이 질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1회기가 끝날 무렵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질문을 통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음 주에는 조금 더 유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2회기에는 작성해 갔던 문장 완성 검사지와 TCI 검사 결과를 기반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적이 종종 찾아왔지만 나는 정적이 익숙한 편이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천천히 마주하며 잘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다른 내담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상담 시간이 다 가곤 해요. 아, 내가 또 잘못하고 있나. 입을 다물었다. 내담자님 처음 뵀을 때 화난 줄 알았어요. 지겹도록 듣는 냉한 첫인상 소리. 인사 잘하고 생긋생긋 좀 웃으라고 시키던 엄마가 떠오르고. 처음 만난 사람 보고 화난 적 한 번도 없는데. 할 말이 없어지고. 제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답답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대답과 동시에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한테 혼나던 때 같네요, 하면서. 어린 시절 나는 자주 혼나고 울음을 참지 못하던 아이였고 울 때마다 엄만 그랬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 네 생각을 말하라고. 엄마는 지금 답답한가 보다. 그렇지만 입이 안 떨어지는데 어떡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서움에 떨며 훌쩍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상황이 오버랩됐다.


어머니랑 비슷한 나이대, 같은 여성이어서 더 그 상황이 비쳐 보였을 수 있어요. 남자 상담사였으면 내담자님 반응이 달랐을 수도 있고요.


나보다 나이 많은 여성을 처음 만나면 입이 굳고 정적을 자주 만들던 내가 떠올랐다. 어른을 대하기 어려운 나, 싹싹해야 한다고 강요받았지만 싹싹할 수 없었던 내향형 어린이. 나는 엄마에게 자주 혼났으니 어른에게 싹싹하지 못하면 혼날 일이 된 것만 같았다. 꽁꽁 숨겨 놨던 어린 시절의 나를 갑작스레 마주하게 되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냥... 힘들었다. 직면한다는 건.


상담 선생님께서는 지금 저랑 있는 시간 불편하시죠, 그래도 남은 상담 전부 나오셔야 돼요,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요 같은 말을 하셨고, 나는 그 말에 안도했는데, 안도감이 조금은 쓸쓸해서 어떤 안도감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나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나는 왜 자꾸 버림받을 걸 걱정하고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일까. 다가올 상담 시간이 무섭기도 하지만 다음번에는 내 버림받음과 미움받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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