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기는 나의 관계에 대한 불안과 사랑에 대한 관념을 주로 이야기했다. 과거 인연들과의 갈등 상황과 이별 사유, 지금의 연인과의 연애 방식, 내가 느끼는 진정한 사랑. 그런 것들을 한참 이야기하는데, 대뜸 상담자가 물었다. 이런 얘기해도 돼요?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상담이니까 하는 게 낫겠죠? 같은 말로 운을 띄우며.
3회기까지는 내담자님이 엄청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는데, 오늘은 좀 애기처럼 느껴지네요.
애... 기요?
내담자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실제로 존재할 것 같아요?
관계와 사랑이 중심인 나는 언제나 단 한 명의 운명적인 사랑을 꿈꿔 왔고, 관계를 지켜나가는 것이 삶의 좌표계이자 매일의 고민거리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나는 종종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그 감정만으로도 가끔은 구닥다리 같고 사랑 타령 같은 건 특히 더 유치하게 느껴져서, 다른 것 신경 쓰기도 바쁠 때에 감정 따위에 누구보다 열심히 놀아나는 것 같은 내가 꽤 싫었다. 그래서인지 사랑 에세이 같은 건 제목만 보고도 치를 떤다. 내 글에는 더 박하고. 사랑에 빠진 채 썼던 글들을 한참 뒤에 봤을 때에 느껴지는 그 감정 과잉이란, 평생 아류작만 쓸 수 있는 비운의 인터넷 소설 작가가 된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사랑 좋아 인간이라서 또 쓰는 글은 사랑 글이야. 아무튼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만으로도 시원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상담자가 콕 찌른 것이다.
모든 인연은 시작점과 끝점이 정해져 있고 관계의 종말은 그 사람과 나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거라는데, 나는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게 잘 안 됐다. 최근 나의 종결된 관계들을 떠올리면, 상대방은 전부 그런 말을 했다. 네 탓이 아니야. 그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냥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 인연이라는 건 대체 뭐길래 시작할 때는 분명히 운명인 것 같다면서 끝날 때에는 인연이 아니라고 끊어 내는 건지. 끊임없는 기대와 착각과 상처의 굴레는 되레 나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해 줄 단 한 명의 구원자에 대한 열망으로 변모해 갔다. 나는 이걸 낭만으로 여겼는데, 누군가에게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 같은 발상이었을까.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다신 같은 상처를 받지 않고 싶어서 오히려 사람을 멀리하게 된다던데, 나는 상처받을 때마다 사람으로 치유받고 싶어 했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못난 구석까지도 나라는 이유로 포용해 줄 수 있는 사람. 유치한 사랑도 코미디처럼 여겨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게 전부 나의 허황된 꿈이라면, 나는 무엇을 잡고 살아가야 할까?
상담자의 "애기 같네요"라는 말에 긁혀서 내 사랑을 같잖은 것들로 치부하기에 나는 이미 내 사랑을 너무 믿는다. 아마 나는 계속 영원한 사랑을 찾고 또 기대하고 착각하겠지.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겠지. 이 사실이 나쁘진 않다. 내 안의 사랑이 썩어 버리고 동나기 전까지는 전부 소진하고 싶다. 나는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이고 그 힘으로 살아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