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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pr 28. 2024

뱉어야 사는 사람

카펜터스와 일요일 아침, 우리들의 주파수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안 되는 사람. 이 기질은 언제부터인가 나의 주된 성정으로 작용했고 종종 나를 들쑤셨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게 회사 생활 중 기어코 이 버튼이 눌려 버려서는 며칠 내리 불의에 맞서야 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까지 정당함에 대해 고찰했다. 나는 왜 자꾸만 대항하는 사람이 되어 있나, 나의 투쟁심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나는 왜 안 되지, 세상은 모순 투성이야, 참는 사람들은 단지 불이익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나에게 불이익 따위는 나의 당위성에 비할 바 못 되는데. 나에게 떳떳해야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증명하고, 증명받고자 하는 게 다인 삶. 그러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끼이는 것이 반복되는 삶. 역시 너무 괴로워. 몇 번을 더 설명하고 요구해야 하는 걸까. 나 요구하는 사람 그만하고 싶은데.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고 떼쓰는 기분. 이런 거 몇 번이나 겪었더라.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금요일 밤이었다. 일주일을 감내한 나에게 어떠한 보상 같은 것을 주고 싶었다. 금요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고 삶이 나를 흔든다 한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잔뜩 모아 뒀으니 그럴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면 그만이었다. 온더락 잔에 버팔로 트레이스를 붓고 디제잉 콘솔을 연결했다. 얼음 사이 버번 단내가 확 올랐다. 좋아하는 술이라고 소개해 주던 친구와 같이 사러 가던 골목길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으니 다른 것 사자고 해도 진열장 꼭대기까지 손을 뻗던 너. 결국 손에 넣고 기뻐하던 너. 새벽이었고 우리는 새벽을 좋아했었지. 쉽게 흐트러지고 서슴없어지는 그 시간을. 그날은 너 없이도 새벽까지 깨어 있었고 나는 밤새 셋 리스트 한 개를 완성했다. 엉망진창으로.


주말도 엉망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것들만 하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방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오랜만에 글을 써야지. 세계문학전집 중 마음에 드는 소설 한 권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여기저기서 그 책을 읽으면서 허구 속 진실을 찾게 되겠지. 거짓말 같은 세상 속에서도 진실한 것 하나쯤은 있어. 좋아하는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향수를 뿌렸다. 버스 오른쪽 자리에 앉아 그새 녹음이 진 나무를 구경했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겠어. 휙휙 바뀌는 것들은 종종 나를 집어삼킨다. 쓸쓸한 음악을 찾아 들었다. 계절만큼 빠르게 내릴 곳에 도착했다. 성산동이었다. 산 적 없이도 오래 산 것 같은 동네. 나는 변두리 예술가들이 살 것 같은 빛바랜 이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오랜만에 찾은 책방은 여전히 아늑했다. 바하마스의 음악이 흘렀고, 책마다 추천하는 이유가 붙어 있었고, 나는 이유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시간이 끔찍이도 좋았다. 서가에는 세계문학을 읽고 싶던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달과 6펜스가 펼쳐져 있었다. 솔직하고 감정이 많은 사람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메모, 적당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정체 모를 원시적인, 본능적인 불안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 추천사, 책 귀퉁이에 함께 즐기기 좋은 그림이라며 붙어 있던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프린트. 취향을 공유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 생기면 이곳으로 그 사람을 데리고 오곤 했다. 내 취향은 이런 거야. 너도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읽히니. 이런 마음으로. 그 마음을 그날도 느꼈다. 나는 이렇게 원 없이 자세해지는 것들을 좋아해. 너도 이 마음이 읽히니. 구멍 뚫린 치즈처럼 군데군데 흠집나 있던 마음 사이 노란빛 같은 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칠흑 같은 밤바다 한가운데 침대를 두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와 자다 깨는 걸 반복하는 꿈을 꾸었다. 꿈결의 잔물결에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밤 사이 내가 보고 싶었다는 귀여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같이 파도 소리 들었던 거 넌가. 나는 조금 웃고 카펜터스의 음악을 틀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마가린에 토마토와 달걀을 볶았다. 좋아하는 노란색 찻잔에 커피를 내렸다. 얼음 한 개를 동동 띄우고 녹는 과정을 천천히 구경했다. 녹는 걸 좋아한다는 걸 비밀로 포장했다 들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쌉쌀한 검은 물을 홀짝이며 이것저것 펼쳐 읽었다. 어제 산 책부터 좋아하는 시집까지. 때 지난 달력 뒷장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했다. 안미옥 시인의 <비생산>.


그 시에 우리가 많이 묻어 있다 생각했다.


나는 좋아하는 동네가 있다는 게 좋았고 좋아하는 동네를 설명하는 순간이 좋았다. 못 보던 가게가 생겼다고, 차고를 야외 테이블로 쓰고 있었다고, 공간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어느 곳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시시콜콜 떠드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것들이 자주 떠오르는 게 좋았고 어느 사소함 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고 귀히 여길 수 있는 우리 존재가 좋았다. 향수에 젖는 네가 좋았고 언제 어디서든 주파수 맞출 수 있다는 그 기분이 좋았다. 자꾸만 무언가를 설명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갑작스러움이랄 게 없어지고 마음껏 깊어져도 좋을 사람들이 있다. 나의 좋음이 너의 좋음이 되고 너의 궁금함이 나의 궁금함으로 번지게 되는 사람. 온 힘을 다해 주는 사람과 온 힘을 다해 받는 사람. 그게 너와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거짓말 같은 세상 속의 진실한 것. 원 없이 자세해질 수 있는 것. 이런 데에서 나는 너를 떠올린다.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안 돼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꼭 너한테 뱉어야 되는 사람. 이 모든 건 나인데. 참지 못하고 나는 또 묻는다. 너 오늘은 무엇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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