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전이 선사한 꼬질꼬질 대학생의 첫 비즈니스석 경험
때는 바야흐로 한 달 반 전, 4월 27일 오전 5시 경이었다.
일단 짧은 소개부터 하자면, 샌프란시스코에서 1학년을 마친 미네르바 대학생 21살 아무개다. 미네르바에 오기 전엔 국내 대학에서 한 학기만 다니고 자퇴를 했다. 현역으로 입학한 내 고등학교 친구들, 한국 대학 동기들은 현재 벌써 대학교 3학년이다. 미네르바 입학 전엔 교대를 다녔는데, 카카오톡에서 교대 동기들 프로필사진 변경 알림이 우르르 뜨는 시즌이 1년에 두어 번 있다. 프로필을 하나씩 눌러보면 교생실습에서 만난 작고 귀여운 아이들과 찍은 사진일 경우가 많다. 1학년 때 만난 3학년 선배들은 지금 발령 대기 중인 분들도 계시고, 기독교 동아리에서 만난 교대 졸업생 언니들 중 결혼 후 출산하신 분도 계신다.
이런. 의도치 않게 서론이 길었다. 다시 돌아가자.
미네르바는 겨울 방학이 약 3주, 여름 방학이 거의 4달에 가깝다. 미국에선 여름 인턴을 하는 대학생들이 많아 겨울 방학이 짧은 대신 여름 방학이 (아주) 긴 편이다. 모든 미국 대학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참고하길 바란다.
아무튼 4월 중순에 종강을 하여 4월 27일 밤 8시 스페인행 비행기를 끊어놓은 상태였다. 어째서 곧바로 한국 귀국이 아닌 스페인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시 또 산티아고 순례길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 샌프란시스코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범죄율도 악명도 가장 높은 텐덜로인 초입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한 치안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3명의 룸메이트와 한 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했고 아찔했다.
올해는 기숙사 건물 바로 앞에서 총격 사건으로 사망자가 발생해 노란 테이프가 3 미터 반경으로 건물입구를 둘러싼 적도 있었다. 건물 앞 태국음식점은 마약중독자들의 마약 거래 장소로 자리잡은 듯하다. 저러다 차가 터지진 않을까 생각이 들만큼 힙합 노래로 들썩이는 차가 코너를 돌면 조수석에서는 익숙한듯 창문을 내리고 무리에게 손을 내민다. 건물 앞 그 무리의 거의 대부분은 엉덩이가 드러나게 바지를 내려입는데 그들 뿐 아니라 많은 홈리스나 마약 중독자들이 동일한 차림을 하고 있다. 흘려내리는 바지를 새기팬츠(saggy pants)라고 하는데, 이는 교도소에서 벨트 착용이 금지된 죄수들의 옷차림에서 유래되어 범죄율이 높은 흑인 커뮤니티에서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들에겐 '자유롭고 멋진 반항아' 스타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들은 바로는 새기팬츠는 교도소에서 출소했음을 암시해 상대에게 위협감을 준다고도 한다. 종종 그 무리를 지날 때마다 태국음식점 사장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또 이야기가 샜다. 아직도 두 번째 문장에 머무른 상태다.
27일 오전 9시에 기숙사 체크아웃이었기 때문에 당일 새벽 5시까지 머리를 끙끙 싸매며 짐을 싸고 있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학교 선배 편으로 29인치 캐리어 하나를 보내기로 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캐리어 세 개를 대형 캐리어 하나로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곧, 1년치 짐을 한국으로 보낼 29인치 캐리어 하나와 6주 여행용 30 리터 배낭 하나로 압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도치 않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던 나였던 것.
3개월 전, 순례길을 걷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경유하여 곧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항에 도착하는 연결 항공권을 발권했다. 그러던 중 출발 당일 새벽 5시 경 비행기표를 예매한 트립닷컴 측에서 긴급 메일을 받았는데, 샌프란시스코발 바르셀로나행 항공편이 하루 연기되었다는 통보메일이었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만약 산티아고로 가는 직항편이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경유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행 항공편이 있어 일정이 어긋나버렸다. 샌프란시스코발 항공편이 하루 연기되면서, 바르셀로나발 산티아고행 항공편과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그렇다. 이날은 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대규모의 정전 사태가 발생한 날이었다. 수천만 명이 피해를 입은 이른바 유럽 대정전으로, 왜하필 그날이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연기된 날짜에 바르셀로나로 출국했고, 뜻밖에도 인생 처음으로 무료로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를 받아 11시간 비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게이트 앞에서 꼬질꼬질한 순례자 차림으로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내 좌석이 속한 그룹이 비즈니스석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저 돈도 없는 코흘리개 21살 짜리 대학생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견뎌낸 1년 간의 고생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말이 안 될 정도로 시작이 좋았다.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좋았다. 순례길도, 그 이후에 펼쳐질 6주 간 세계여행도 기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화 예고]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순례자 — 그리웠어,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