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순례길에서 또르띠야가 준 교훈

스페인식 감자오믈렛 주문팁(Tip)

by 채니

짹짹. 2025년 5월 3일. 새 날이 밝아왔습니다.


이날은 순례 3일차로, 이틀밤을 지내게 될 작은 항구 마을 묵시아(Muxia)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늦잠을 자 주고, 아침 8시 즈음 숙소를 나왔다. 아침 내내 보슬비가 내렸는데, 트레킹화 없이 쪼리로 숲길에 오른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또, 방수 아우터도 없었던 나는 내 면 셔츠가 서서히 축축해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고.


미끄러지지만 말자. 그럼 끝장이다.



비를 뚫고 2시간 정도를 걸어 첫 카페에 다다랐다. 애정하는 또르띠야 데 빠따따(스페인식 감자 오믈렛)를 찾았지만 메뉴에 없었던 탓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 카페라떼와 시판 빵 하나로 허기를 달랬다. 비가 주륵주륵 오니 몸도 마음도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한다. 일반 우비도, 배낭까지 덮을 수 있는 판초우비도 없었다 보니, 옷도 가방도 젖어가던 참에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온 50대 아주머니셨다. 내 배낭에 주렁주렁 달린 러닝화가 비에 젖는 걸 보시고는, 본인 배낭에서 노란 비닐봉지를 꺼내어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신발의 존재를 까먹은 나보다 내 신발을 더 아껴주시는 다정한 아주머니셨다. 아주머니께 비닐봉지를 건네받는 순간, 아주 근사한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맞다. 미국에서 가져온 2불짜리 은박돗자리가 있었지.


그렇지, 내가 이는 없어도 잇몸은 있지. 잠시 멈춰 서 배낭을 뒤적거리다 돗자리를 꺼내곤 머리끈으로 묶어 배낭에 고정시켰다.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순례자의 흔한 패션


약 10분 전에 만난 독일 아주머니가 찍어주신 사진인데, 만난지 얼마 되었다고 여기서 우리는 작별을 해야만 했다. 위 사진이 찍힌 곳은 다른 두 방향을 가리키는 두 개의 비석이 놓인 지점이다. 피스테라-묵시아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누구나 이 지점에서 둘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왼쪽은 피스테라, 오른쪽은 묵시아로 향한다

왼쪽은 피스테라(Fisterra)마을로, 오른쪽은 묵시아(Muxia) 마을로 향하는데, 나는 먼저 묵시아에서 이틀밤을 묵고 피스테라에서 순례를 마무리 할 계획이었다. 즉, 사진 속 거대한 배낭을 멘 순례자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어느 마을이 더 우월함 없이 두 마을 모두 각자의 아름다움을 갖는다. 피스테라(Fisterra)는 순례자를 제외해도 찾는 관광객이 비교적 많아 다소 정신없고 관광지스러운 분위기라면, 묵시아(Muxia)는 바다가 넓게 트인 작고 조용한 항구 마을이다.



비는 그쳤지만, 오전 내내 먹구름 가득 낀 하늘 아래서 걸어야만 했다. 피스테라와 묵시아로 나뉜 뒤로부터 순례자 수가 눈에 띄게 확 줄어든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두 번째 카페에 들어서기 전까지 만난 순례자는 서너 명이 전부였다.


물론, 이 길을 걸은 순례자는 분명 서너 명보다 많다. 다만 나보다 발 빠르고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일찍 일어나 한참을 앞서 걷고 있을 테니 안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뙤약볕 아래서 걷고 싶어하는 순례자는 많지 않을 것으므로. 자기합리화는 아니지만 늦잠을 자면 장점이 하나 있다. 길 위에서 온전히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나 역시 가능한 스페인 태양이 없을 때 걷고 싶지만, 못 일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가끔은 합리화도 유용한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카페에서 또르띠야를 찾았지만 애석하게도 없다고 해서 무척이나 슬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또르띠야와 카페라떼 조합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마침 카페 주인 할아버지는 카페와 바로 옆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계셔서, 아쉬운대로 슈퍼마켓에서 잠봉맛 감자칩과 레몬 요거트를 사서 카페라떼와 함께 먹었다.


감자 오믈렛이 없다면 감자칩으로. 하지만 은박돗자리만큼 성에 차지는 않았다.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던 순례자에게 요거트를 하나 건넸다. 이틀 전부터 매 숙소에서 만난 슬로바키아 친구 Tibor이다. Tibor와는 지금도 종종 왓츠앱으로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데, 나는 그와 헤어질 때도 요거트를 주며 작별을 했을 정도로 우리 둘은 요거트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감자 계란 전


이날은 32km 정도를 걸어야만 했기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카페 문턱을 넘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세 번째 카페를 만났을 때는 맑은 하늘 아래서 나를 향해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걷고 있었다.


카페에서 주문할 때 첫 문장은 Hola(안녕)! 두 번째는 어김없이 '또르띠야 있나요?'


카페주인이 턱을 만지며 잠깐 고민하는 게 보였다. 고심 끝에 있다고 하길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접시에 담긴 정체를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약 십오분 뒤, 그는 납작한 감자 계란 전을 들고 등장했는데 이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비주얼이었다. 감자와 계란이 들어갔으니 또르띠야가 아니라고는 반박 못하겠지만, 누가봐도 메뉴를 위해 만든 메뉴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계산할 때 이 감자 계란 전에 10유로가 넘게 청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또르띠야 한 조각이면 비싸야 3.5유로인데 말이다. 진짜 또르띠야도 아닌 감자 계란 전 한 판에 10유로를 내게 된 것에 서글펐다..


‘주인장님… 없으면 없다고 했어야죠!’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내 짧은 스페인어 실력이 잘못이다.




계산을 하면서 2년 전 순례길을 걸었을 때 또르띠야와 관련된 웃긴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한 번은 Sarria라는 도시에서 카페보다는 조금 큰 식당에 가서 짧은 스페인어로 당당하게 또르띠야를 주문했다.


Una tortilla, por favor!

또르띠야 하나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 보고는 재차 물었다.


Una Tortilla?

또르띠야 하나 말씀하시는 것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하나 보여줬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전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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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거대한 감자 오믈렛을 들고 왔을 때, 내 눈은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옆 테이블의 할머니와 손녀도 나를 똑같이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고, 나는 "나도 몰랐어요..."라는 듯, 그보다 더 크게 눈을 뜨며 화답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같이 드실래요?


영어를 할 줄 알던 20대 손녀는 나에게 포장해 가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주고 자리를 떴다. 나는 9유로짜리 거대한 또르띠야 중 두 조각 정도 먹고, 결국 포장했다.


또르띠야를 주문할 땐 1인분을 뜻하는 porción이라는 단어를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다른 교훈은 직원의 반응이 이상하면 꼭 확인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단어 하나만 배워보자.


porción (1인분)


(예) Quiero una porción de tortilla, por favor.

또르띠야 1인분 주세요


그래야 우리 모두 또르띠야 한 판짜리 운명을 피할 수 있다. 그대는 한 조각을 원하는가. 한 판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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