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쫄깃했던 순간들
이날은 아주 거하게 늦잠을 잔 날이었으므로, 하루종일 뙤약볕 아래서 걸어야만 했다. 화창한 날씨와 선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그러다 어느 순간,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이 눈 앞에 펼쳐지자 조금씩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내가 가야 할 모든 길을 미리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때로는 힘이 되고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부담과 스트레스로 이어지곤 한다.
'아니, 어느 세월에 저걸 다 걸어...'
가끔은 차라리 나의 앞길을 모르는 게 좋을 때도 있는 것 같다. 두려움으로 발목을 사로잡혀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니까.
이날이야말로 내가 가야할 길을 모르는 게 좋았던 날이었다. 100m 정도만 내 눈앞에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구불거리는 저 길이, 부디 내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딱 100m만, 아니 딱 열 걸음 분량만.
투덜거리며 걷던 중, 부담감 최고조에 이르게 한 높은 언덕이 눈에 슬슬 들어오기 시작한다. 땡볕에 달궈져 이미 체력적으로 충분히 지쳐버린 상태였는데, 하늘과 맞닿아있는 저 거대한 언덕을 넘어야 하다니.
다른 길은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춰 설 수도 없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부지런히 꾸역꾸역 걸어갔다.
어라, 가까이 가 보니 비석이 가리키는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순례자들에게 표지판이 되어주는 비석이 가리키고 있던 방향은 앞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간이 이렇게나 단순하다. 그러고 보니,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초록 이끼로 가득했다. 한참전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걸어왔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군.
아무도 넘으라고 한 적 없는 언덕이었는데, 나혼자 스트레스 받아하며 힘들어했던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길고 길었던 오늘의 순례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나니 무척이나 개운했다. 기분이 좋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인간은 어쩜 이리 단순할까. 음악을 들어야지 하면서 주머니를 더듬는데
어라, 에어팟이 만져지지 않았다. 걸으면서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고 걸었더니 벌어진 참사였다.
아, 역시 에어팟을 꽂고 걸었어야 했나 보다. 이전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에어팟을 찾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애플의 Find My 기능으로 에어팟 위치를 확인하는데, 세상에. 저건 누가봐도 이전 숙소 침대에 떨군 것이 분명했다. 에어팟 위치도 모르는데 찾으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숙소 주인이 이불시트를 쓰레기통에 넣었다면 이미 끝장이다.
내 코 묻은 돈으로 큰맘 먹고 산 에어팟 프로였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경량패딩. 5월이어도 밤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항상 경량패딩을 입고 자던 나였다. 그래도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지금 경량패딩은 배낭 안에 있고, 에어팟이 7~8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위치는 저 멀리 있는데.
카페에서 쉬고 있던 나는 곧장 숙소로 달려가 경량패딩을 찾았다. '제발, 제발..'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급히 패딩 주머니를 더듬기 시작한다.
그 순간,
콩나물 두 개가 만져졌다.
결국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어제 나는 에어팟을 경량패딩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잠에 들었을 것이다. 깜빡하고 에어팟을 케이스에 넣어두질 않아, 아침에 배터리가 닳은 상태로 자연스럽게 이전 숙소에서의 위치가 마지막 위치로 업데이트 된 것이다.
심장이 쫄깃했던 순간들로 가득했던 오늘. 안도의 한숨을 적어도 백 번은 내쉰 것 같다.
귀하디 귀한 에어팟을 꽂고 시원한 콜라와 함께 음악에 쉼취해 있는데, 내 팔과 발등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선크림은 얼굴에만 덕지덕지 바르곤, 다른 햇빛 노출 부위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였다. 결국 발등은 쪼리결대로 구워졌고, 팔은 선명한 반팔 경계선에 맞춰 벌겋게 익어버렸다. 너무나 웃겼던 나머지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는데, 이날 이후로 반팔을 입고 걸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두 달이 지난 오늘도 두 경계선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어, 친구들을 만날 때 마다 순례의 흔적이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친구들은 당연히,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