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이 두렵지 않다면 당신은 진정한 프로페샤-날
짹짹. 2025년 5월 2일, 순례길 둘째날이 밝았다.
눈을 번쩍 떴을 때 왠지 지나치게 밝은 느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하게, 그것도 아주 거하게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아홉시 반이라니.
2년 전에 걸었을 때는 여덟시 정도에 일어나 걸었는데 아홉시 반은 좀 과하긴 했다. 그러나 조금은 예상했던 그림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고 자책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 웃음만 나왔다. 모두가 떠난 고요한 방에 홀로 남겨진 상태였다. 사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때는 체크아웃 시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고, 아래층에서는 청소기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계단을 타고 내려가 청소 중이시던 주인 아주머니께 손짓발짓을 해가며 늦잠을 자서 미안하다고, 얼른 준비해서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웃으시면서 괜찮으니 천천히 준비하라고 하셨다. 가슴이 찡했다. 한 시간 전에 체크아웃을 했어야 했던 순례자를 보고도 당황한 기색이 없는 너그러운 아주머니. 이전에도 나같은 순례자가 더 있었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축축 젖어있었다. 전날밤 뒷마당에 널어둔 빨랫감을 걷으러 갔을 땐, 촉촉한 옷가지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빨래 직후보다 물기를 더 가득 머금은 채로 내게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데 어째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숨을 푹 쉬고, 빨랫감의 물기를 쭉 짰다.
숙소를 나오니 거의 10시였다. 어제는 설레서 새벽 5시에 깼는데 오늘은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이런 양극단을 달리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만 나왔다.
끄덕끄덕. 그렇지. 이래야 나지.
그렇게 10시 즈음,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길바닥도 하늘도 축축하니 처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 앞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자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쪼리를 신고 있었는데, 전날 신었던 러닝화가 오히려 더 내 발을 불편하게 조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8km를 남기고 쪼리로 갈아 신었는데, 갈아신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는 있지만, 그 이가 오히려 내게 고통을 줬기에 차선책인 잇몸을 택해야만 했던 것.
아침을 먹고 시작할까도 했지만, 왠지 금방 카페가 나올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에 숙소 앞 카페를 외면하고 걷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공복으로 3시간을 더 걸어야만 했다. 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길 위에서 호주에서 온 할아버지 필립을 만났는데, 그는 쪼리로 걷는 내가 신기하다며, 발 괜찮냐며, 본인의 샌들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수풀 속을 뒤적이더니 나무 막대기 하나를 꺼내어 지팡이 삼으라며 내게 건넸다. 스윗한 할아버지.
필립은 호주 브리즈번에서 사업체 두 개를 운영하는 CEO였고, 4주 정도 휴가를 내고 첫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작은 체구의 멋쟁이셨다. 그의 걸음은 어찌나 빠르던지, 필립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거워 그의 속도에 맞춰 걷다가 결국 체력에 부쳐 그를 보내줘야만 했다.
'필립,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천천히 갈게.'
늦잠을 자게 되면 단점은 분명하다. 늦게 일어난 만큼 땡볕에 오래 걸어야 한다는 것. 괜히 순례자들이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괜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침형 인간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 같은 존재다.
일찍 일어나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차라리 땡볕에 고생 좀 해도 푹 자는 쪽이 낫다. 결국 모든 순례자는 자기 페이스에 맞춰야 하는 것 같다.
늦잠의 또 다른 단점은 숙소 경쟁이다. 늦잠을 자면 숙소를 구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본인에 대해서 잘 알면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이유는, 나는 내가 언제든 늦잠을 잘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서 전날까지는 무조건 숙소를 예약해놓기 때문이다.
먼저, 왓츠앱이나 부킹닷컴(Booking.com)으로 예약 가능한 숙소들을 찾아둔다. 가장 저렴한 숙소는 공립 알베르게지만 예약을 일절 받지 않으며 무조건 선착순으로만 운영하는 숙소이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걷는 순례자들이 많은데, 나는 이 경쟁에 낄 수 없다.
공립 알베르게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는다. 부지런한 순례자들과의 경쟁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돈을 더 내더라도 항상 사립 알베르게에서 묵는다. 먼저 왓츠앱으로 예약을 시도했다가 숙소 주인에게 답장이 오지 않으면, 수수료를 더 내서 부킹닷컴으로 어떻게든 전날밤까지 예약을 해놓는다. 누울 곳을 걱정하느라 소중한 하루를 망칠 수 있으니까. 지갑이 두껍지는 않지만, 마음의 평안을 사는 데 드는 수수료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