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어리석음과 후회도 유익했나

무리한 걸음과 놓쳐버린 순간들

by 채니

5월이었지만 이른 아침이었던지라 몸이 으슬으슬했다. 순례길 첫날, 맞닦뜨린 첫 카페에서 몸을 녹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온땅을 장악했던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었던 초록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참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행복했다. 맞아, 난 이 순간이 너무나 그리웠었지.



경사 탓인지 햇빛 탓인지 점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결국 경량패딩을 벗어 가방 깊숙이 도로 넣어야만 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한 숲길. 나에게는 햇볕이 내리쬐는 소리마저 들리는듯 했다. 이른 새벽에 도미닉과 함께 걷던 숲길에도 비석은 여러 개 있었지만, 초록 사이에 놓인 비비드 컬러의 비석은 유난히 앙증맞고 귀여워보였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 배낭과 운동화였다. 미국에서 종강하자마자 산티아고로 날아온 나는, 순례길을 전혀 계획하지 않았다. 배낭은 평범한 학교 백팩이었고, 신발도 러닝화였다. 한국에서 출발했더라면 집에 있는 트레킹화나 하이킹 배낭을 가져왔을 텐데, 나홀로 샌프란시스코에 떨어진 가난한 유학생은 배낭과 트레킹화를 새로 살 여유가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마인드로 어깨를 으쓱하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순례길 첫날부터 나는 그 결정을 크게 후회했다.


순례길에 다른 건 몰라도, 배낭과 운동화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깨나 허리가 피로감에 짓눌려 걷는 즐거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하려고 걷는 길인데,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 옷가지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걷는 즐거움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발이나 어깨에 부담이 되는 장비는 그 기분을 단숨에 망쳐버리곤 한다. 그러니 마냥 돈을 아끼는 것도 절대적으로 현명한 것은 아니다.



많은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20km 떨어진 Negreira(네이그레라) 마을에서 묵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고 8km 정도 더 떨어진 A Pena(아 페냐) 마을로 향할 생각이었다. 큰 마을이 싫다는 고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일정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나흘 안에 묵시아-피스테라 길을 완주해야만 했었고, 바다가 보이는 땅끝마을 묵시아에서 연박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나의 선택은 아쉬웠고 많이 어리석었다.


일정을 줄이는 바람에 나는 매일 평균 28km 정도를 걸어야만 했고, 내일도 모레도 그 정도로 걸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내일도 오늘과 같겠지'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건 설렘이 아니라 걱정이자 큰 부담이었다.


예쁜 땅끝마을에서 이틀을 묵겠다는 계획으로 어리석게 강행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매일매일이 더 예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땅끝마을에서 연박을 할 때에는 딱히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았다. 또다시 순례길을 걸을 때는 꼭 기억해야겠다.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목적이고 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상황을 어느 직장인의 휴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력셔리한 고급 리조트에서의 짧은 휴가를 위해 5일간 뼈를 갈아 일한다. 그러나 과하게 무리하게 일했던지라 지쳐버려 휴가를 정작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상황. 하루를 위해 하루하루 예쁜 순간을 무시했던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연박이 도대체 뭐라고.


우리는 그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겠지. 매순간을 기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이번 순례길을 통해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깨달음이 있었으니, 나의 어리석음과 후회도 유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자기합리화일지 모른다. 유익했지만 여전히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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