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어둠 속에서 만난 순례자

묵시아를 향한 첫걸음 - 프랑스 할아버지와 함께

by 채니

2025년 5월 1일, 알람도 없이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약 10명 정도가 같이 묵는 방이었던지라 전날밤에 미리 싸둔 배낭을 조용히 들고 로비로 나왔다.


이틀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와 시차 부적응의 결과였는지, 2년 만에 걷는 순례길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 때문이었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눈이 떠졌고, 오늘 나는 그저 걸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어깨에 멘 배낭이 실제로는 벽돌마냥 무거웠지만 2년 만에 걷는 순례자에게 그깟 벽돌 쯤이야. 배낭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둑한 새벽 5시 21분,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A Peña(아 페냐)로, 산티아고에서 서쪽방향으로 약 28km 떨어진 작디작은 마을이다.


새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아뿔싸. 도심을 벗어나 걷다보니 앞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적막한 새벽에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일한 단점은 그 고요함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


가로등이 싹 사라진 어둑한 숲길이 눈앞에 펼쳐지니 그 순간 후회가 잔뜩 밀려왔다.


'아, 어떡해. 나 너무 일찍 출발했나 봐.'


급하게 날씨 어플로 일출 시각을 찾아보니, 해가 뜨기까지 약 한 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부터 머리가 멍해졌고 얼른 다른 순례자가 나타나 동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면서도, 이 시간에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단 걸 알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거의 모든 순례자에게 종착점이지만, 나는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슨, 서쪽으로 이어지는 오늘 이 길을 걷는 순례자 수는 현저히 적다는 뜻이다. 그러니 옵션은 숲길을 동행할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밝아질 때 까지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발을 동동 구르던 중, 5분도 채 안 되어 헤드랜턴을 쓴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프랑스에서 온 할아버지 도미닉이었다. 그렇게 나의 빛이 되어준 할아버지 도미닉과 어두운 숲길을 걷기 시작한다. 도미닉은 영어를 드문드문 했고, 나는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짧은 영단어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도미닉에게 어둠이 무섭지는 않냐고 물었다. 나는 숲길을 예상하지 못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지만, 도미닉은 이 캄캄한 숲길을 동행없이 혼자서도 걸었을 테니까.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새벽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기를, 어둠과 적막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지금은 꽃과 나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경이로운 순간’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였고,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도미닉은 프랑스 어느 마을에서 시작해 순례길을 걸은지는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고 했고, 길고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었다. 묵시아-피스테라 길을 마치면 포르투갈로 넘어가 휴양을 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어둠은 슬며시 걷어지기 시작했다. 도미닉과 나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지만,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순례길을 걸어본 순례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순례자의 사색 시간을 존중하면서 자기만의 시간도 존중받고 싶어하는.


날이 밝아옴에 따라, 걸음이 느린 나는 조금씩 뒤처졌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며 걷게 되었다. 그렇게 걷다가, 앞서 걷던 도미닉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이 아닌 왼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표지판으로 보나 지도상으로 보나 분명 오른쪽이 맞는 길인데, 그는 뚝심있게 왼쪽방향으로 걷고있는 것이었다.


나는 체력적으로 지쳐있었지만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도미닉! 도미닉!'


그가 돌아보았고, 나는 반대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도미닉! 이쪽 길로 가야 해!'


도미닉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등산스틱 하나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보이며 알았다는 사인을 주었다.


나보다 앞서 걷고 있는 도미닉 할아버지


2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카페가 있을 법한 마을이 나왔고, 역시나 눈앞에 카페 표지판이 떡하니 있었다. 왼쪽으로 100m 정도만 더 가면 된다는 친절한 표지판이었다. 도미닉은 표지판을 보고도 계속 걷는 것을 보아 나처럼 녹초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표지판 앞에 서서, 앞서 걷는 도미닉을 불러 작별인사를 할까도 했지만, 왠지 다시 마주칠 것만 같아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후로 나는 도미닉을 볼 수 없었다.


순례길 첫날, 첫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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