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칭다오 경향도서관 문학상 [시 부문] 대상작
제목: 세기世纪의 해바라기 (2022)
대상으로 「세기의 해바라기」를 쓴 *** 학생의 시를 모셨어요. *** 학생은 ‘해바라기’라는 대상으로부터 저를 거리에 두고 저를 이입했다가 빠져나왔다가 그 자유자재를 할 줄 알아요.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재는 줄자를 저도 모르게 손에 쥐어버린 사람이지요. 그 줄자가 아마 타고난 감각 같은 것일 텐데요, 그 줄자에 힘을 입어 집요하게 한 연 한 연 구성을 해나갈 줄 아는 거예요. 그 무엇에 쫓길 필요도 없으니 스스로의 사유와 문장을 스스로 다질 줄도 아는 거예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진지한 태도가 빚어낸 데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발걸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엇비슷함을 느끼게 되지요.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가리키는 방향에 있어서의 시.
< 세기世纪의 해바라기 >
나는 해야
네가 좋아하는 나의 볕
그 볕을 크게 한 줌 내리쬐어
世纪공원을 가득 메운 너는 해바라기꽃
한더위에도 어째서 모두 고개를 빳빳이
나에게서 바라는 게 무엇이기에
아무튼 나를 바라고 있으니
나는 아무래도 좋아
해바라기야
그런데 나는 말이야
그저 너의 낮이 찬란하기를 바라는 마음
네 전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
해바라기야
네게 바라는 건 말이야
나만을 바라던 것은, 바라건대 아니었기를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어서야
뜨건 피가 끓어 솟구침을 느끼면서도
어찌하여 나를 좇느냐는 말이야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겨우 나만을 바라냐는 것이야
해바라기야
오고가는 것들을 바라다
숨이 차고 그림자가 드리울 때야
그제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로
부디 아름다워라
찬란한 너는 너로서 말이야
미련 한 줌도 틈타지 못하게
무작정 바라고
우리 거침없이 저지르기로
< 시에 대한 단상 >
스스로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모두의 꿈은 ‘모’대학 ‘모’과가 되어버렸고,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나도 그만 ‘모’과에 맞추어 우리가 흔히들 바라는 모범적인 답변을 해버렸다. 나의 가치는, 나의 정체성은 그뿐인 것일까. 그곳은 발판일 뿐인데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 나를 가둬버릴 것만 같아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특정 대상의 눈에 들기 위해 생기부를 채워봤다. 과연 내가 진정으로 그것들에 흥미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래서 미래가 그려진다는 친구들, 확신에 찬 저들을 동경했다. 어쩌면 동경을 넘어선 질투였을지도. 모두 자기가 있을 곳을 아는데, 나만 모르는 듯했다. 해보지 않고서야 적성에 맞을지, 스파크가 튈지 어찌 알 수 있을까. 여지를 주지 않는 입시 공장이 그저 매정했고 대학이 밉기도 무지 미웠다. 우리의 위대한 스티브 잡스 형님의 말씀 중 그런 말이 있다지. Follow your heart, 가슴을 따르라는 말. 가슴을 따르는 이 행위를 과연 ‘감정적’인 것이라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현실 파악이 안 되는 누군가의 현실감 없는 도전, 고작 그뿐일까. 어찌됐든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면 나 가슴을 따르렵니다.
해보라는 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내가 그동안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 나와 같은 혼란을 겪었었던, 혹은 현재 겪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고픈 애정 듬뿍 담긴 말. 그리고 이제 나의, 하고 싶으니까 저질러보겠다는, 고작 그뿐인 발악. 간절히 바라고, 저지르기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차마 해내리라는 장담은 나도 못하겠어서. 해내라는 말, 해내겠다는 말, 이 말은 아마 우리 모두에게 부담일 테니 덮어두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