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죽음, 소멸을 받아들일 때라야
흠잡을 데 없이 행복하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냐고 묻거든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항상 인생은 같은 모양이었다. 시간의 흐름도, 상황의 변화도 아주 사소한 것인데 그 흐름과 변화에 붙잡혀 살다 보면 주위를 꽉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행복을 놓쳐버리고 만다.
기억은 생각보다 똑똑하면서도 멍청하다. 아빠는 언젠가 나에게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말씀하셨다. 기억이 소중한 것은, 매 순간 모든 것을 머릿속에, 마음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기억이 있어야만 지나간 일에 의미가 생긴다. 결국 우리는 유한한 것을 사랑한다.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건 적응의 동물이자 학습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맛있고 새로운 음식을 처음 맛봤을 때의 충격과 쾌락은 머릿속에 깊게 남는다. 그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어 다시 맛 볼 기회를 마련하려 애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을 시도 때도 없이 경험하게 되면, 어느새 신선함은 사라지고 흥미로움도 잃게 된다. 언제나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력을 못 느끼고, 심지어는 당분간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만약 처음 맛본 새로운 음식이, 1년 뒤에 지구 상에서 사라진다면? 앞으로 먹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초조하면서도, 매번 먹게 될 때마다 그 순간이 더 행복하고, 감사하기까지 할 것이다.
우리 곁에 있는 존재와 상황이 무한한 것이라면 우리는 흥미와 매력을 잃는 것은 물론,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지 않은가.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을 하고, 소중한 기억을 하루라도 더 보전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이 마치 무한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별과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죽음이라 부르는데, 그 당연한 섭리를 우리는 너무나 먼 세상 이야기처럼 여기며 살아갈 때가 있다. 혹은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회피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극복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피할수록 강하게 드리웁고, 마주할수록 희미하게 자취를 감춘다.
나는 모든 것에, 모든 생명에 끝이 있음을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과정이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도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평생 내 곁에 있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우리 곁을 그렇게 일찍 떠나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슬프게도 엄마의 고귀한 삶은 생각만큼 길지 않았고, 나는 '살기 위해' 그 이별을 부정하지 않고 천천히 받아들였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거나, 경험이 없더라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진 않겠지만, 오히려 절망에 사로잡혀 불행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런 생각 덕분에 주어진 하루에, 주변의 존재들에게 더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죽음을 경험한 이후 오히려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면서 하루를 꼼꼼히 살아가는 것을 포기해버린다면, 그것은 감히 '죽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먹고 선택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말 '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찾는다면 그건 누구나 하루에 감사하고, 주변을 더 사랑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별, 죽음, 소멸. 결국은 끝을 의미한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일은 더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힘든 일은 견뎌낼 수 있게 됐다. 일과 학업에 치어 잠깐의 휴식 시간도 없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이 모든 것들은 다 끝이 있음에 안도하게 되고 또 그 끝이 아쉽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감사히 즐기게 된다.
사랑하는 아빠는 당연하게도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 -불의의 사건 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나이대로 흐른다면- 31년을 앞서 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아빠와도 이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감사하고 소중하다. 아빠는 본가인 전주, 나는 서울에 있으니 생각처럼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마음은 갈수록 애틋해진다. 소중한 이들과 하루하루 이별하며 사는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큰 존재인지, 더 자주 일깨워드리고 싶다. 감사하게도 아빠 또한 같은 마음인 것 같다. 우리는 전화 통화가 꽤 잦은 편인데, 전화를 끊기 전에 꼭 "사랑한다"고 말한다.
늘 행복하지만, 유난히 마음이 충만하고 행복한 토요일 정오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시끄럽게 지나가는 대로변의 차량 소음도, TV 앞에 누워 잠꼬대를 하며 새근새근 자고 있는 고양이도, 새벽까지 일하다가 해가 뜬 다음에야 잠드는 바람에 아직 꿈나라인 남편도. 나 또한 일주일 동안 매일 5시간을 채 못 자면서 꼬박 일하고 공부하며 치열하게 보내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그 힘듦은 내 예상대로 잠깐이다. 이런 종류의 힘듦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어쩌면 사치이고 잘난 척일 수 있다.
혹자는 나에게 스스로를 혹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칭찬하면서도, 내 자세를'아등바등' 혹은 '강박증'이라고 표현하며 냉소적인 관찰자적 시각을 보내는 사람도 분명 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일을 온전히 나를 위해 선택하고 행동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가 행복을 느끼는 범위라면 허용되는 거 아닐까? 기회 또한 무한한 것이 아니니까, 가까이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악력이 강하든 약하든 꽉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인 거다.
오늘 하루도 써야 할 원고와 밀린 학교 과제들로 부지런히 보내야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좋다. 다만 여러 개의 일을 하느라 몸이 부서질 것 같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나날을 잘 버티며 살아가는 나에게, 내일만은... 일도 공부도 안 하고 쉴 수 있는 하루를 선물할 계획이다.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