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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장 Sep 24. 2018

정리해야 사는 뇌

ON AND OFF MEMORY : 뇌파 검사 체험기

'안면 인식 장애'와 '고유명사 증후군'이 거듭되면서 내가 혹시 <스틸 앨리스>나 드라마 <기억>의 주인공이 된 건 아닌지 의심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이야기를 외면해선 안 된다. 문제는 뇌다. 깜빡깜빡한다면, 이제 전전두엽의 안녕을 확인해야 할 때가 왔다.



대명사 화법과 스무고개

<엘르> 편집부에선 회의 도중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 “내가 가본 덴데 거기 이름 뭐지? 파리에 있는 뮤지엄 있잖아.” ‘또 시작이군’ 이라는 표정의 팀원들. 이내 편집장의 스무고개 레이스를 시작할 준비 태세를 갖춘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 <초 (민망한) 능력자들>의 주인공들처럼 ‘염소(!)’를 노려보고 있다. “왜 나무 있고 그랬던 데!” ‘파리에 위치한 나무 있는 뮤지엄’이라니, 스무고개일 줄 알았던 힌트는 두 번에 그쳤고, 결국 그날의 승자는 없었다. 얼마 후 그곳이 장 누벨이 건축한 ‘키 브렁리 박물관(Quai Branly Museum)’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우리 중에 그곳을 방문해 본 사람은 없었다. 다음 회의. “왜 그 80년대 뮤직비디오인데 여자들 나와서 춤추는 거. 뭐지? 리즈 틸버리스가 스타일링한!” “80년대 무비 중에 여자들 나와서 춤 안 추는 게 어딨어요?”라고 투덜대던 음악 담당 후배는 웬일로 투지를 불사르더니 2시간 동안 유튜브를 폭풍 검색한 끝에 정답을 찾았으나 자신이 영아기였던 시절 발표된 로버트 팔머의 ‘Addicted to love’가 아는 노래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출한 단서로 답을 찾긴 했으니 그녀의 힌트가 적중한 걸까. 그간 나는 편집장의 삶에서 얼마간의 기억력과 주의력 소실은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업무량을거침없이 처리하고 있는 40대의 ‘패션 키퍼(Passion Keeper)’, 즉 프린트 매거진을 총괄하고 다채로운 디지털 플랫폼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과 수없이 이어지는 회의, 브랜드와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며 모든 텍스트와 비주얼의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 동시에 에디터와 유관 부서 담당자를 아울러 시시콜콜한 디렉션과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카톡으로 24시간 내내) 주고받는 게 그녀의 반복된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고받은 정보를 ‘들은 기억이 없는 일’로 인지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과거에 분명하게 인지했던 정보를 제대로 꺼내 쓰지 못하는 그녀의 증상이 어느새 나와 가까워졌음을 느꼈을 때,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딘가가 고장 나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뇌의 문제이든, 마음의 문제이든 혹은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이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두근두근, 뇌파 검사

‘만약 불안하거나 우울하거나 강박증이 있거나 화를 참을 수 없거나 쉽게 주의가 산만해진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런 문제가 성격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다.’ 임상 신경과학자이자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니엘 G. 에이멘이 쓴 <그것은 뇌다>의 책 커버에는 기억력과 주의력에 대한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풀어줄 화두가 펼쳐져 있었다. 책을 열어보니 문제는 ‘전전두엽’과 관련이 있었다. 뇌에서 가장 진화한 영역으로 우리의 이마 바로 밑, 안구 안쪽에 위치한 전전두엽은 집중, 주의력, 판단, 충동 통제는 물론 비판적인 사고와 관련된 부분을 관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상황을 잘 살펴보고, 생각을 조직화하고,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그 계획들을 실행 및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녀석에게 과부화가 걸리면 집중력과 기억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시간을 돌려보면 지난 몇 년간 나에겐 기본 업무 외에 새로운 매니징 업무가 추가 또는 변경됐고, 1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실무보단 팀원들의 일을 관리하는 업무 비중이 늘었다. ‘정보의 빠른 입력, 빠른 결정 그리고 빠른 출력’. 디지털 콘텐츠 제작과 매니징을 총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주로 이 3단계다. 하지만 언젠가 “그때 말씀 드렸는데요”라는, 그간 나의 ‘편집장 전용 멘트’를 후배에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그 순간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넘어가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뇌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집중력 센터를 찾은 웃지 못할 이유였다. “보통 기억력이 감퇴되는 원인은 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부주의하고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인데 과한 로드를 통해 이것이 드러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처진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경우예요.” 이곳을 찾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 의사는 큰 범주에서의 두 가지 원인을 밝히며 검사를 제안했다. 누군가는 폐쇄 공포를 호소할 수도 있겠다 싶은 작은 공간에서 이어진 1시간 동안의 검사는 배경 뇌파 진단, 학습 뇌파 진단, 그리고 종합주의력 검진의 3가지였다. 그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던 종합주의력 검진은 시각적 단순 선택 주의력 검사, 청각적 단순 선택 주의력 검사, 특정 문자에 반응하지 않아야 하는 억제 지속 주의력 검사, 간섭 선택 주의력 검사, 분발 주의력 검사, 작업 기억력의 순서와 역순 검사의 7가지 항목을 문제를 풀 듯 해야 했다. “주무시면 안 돼요!” 간호사의 단호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수면부족에다 식곤증까지 겹친 오후 시간의 테스트는 몽롱한 상태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저와 같은 나이 대의 사람이 많이 찾아오나요?” “네. 젊은 분들도 많은데 30대보단 오히려 20대가 많아요. 성인 ADHD 환자들이 생각 외로 많거든요.” 검사를 마치자 간호사는 요즘 부쩍 많아졌다는 성인 ADHD를 포함한 우울감, 불안감에 테스트 용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 3가지 항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ADHD나 우울, 불안 수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고요. 7가지 종합주의력 검진 중에서 ‘분할주의력’과 순서대로 진행한 ‘작업기억력’에서 반응이 저하된 걸 최근 업무와 연결시켜 볼 수 있겠어요. 분할주의력에서 ‘저하’가 보인다는 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때의 처리 속도가 일을 하나씩 할 때보다 느려진다는 뜻이고, 순방향 작업기억력의 저하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이나 이름 등 새로운 정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보면 돼요. ‘그게 뭐였지?’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도 하고요.” 의사의 해석은 이뿐 아니었다. 간단한 문제를 푸는 도중의 뇌파 상태를 보니 좌우뇌의 균형 면이나 인지력과 처리 속도, 능력 등에서 문제가 없었지만 1분 혹은 2분 단위로 집중력이 흐려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 1분 혹은 2분의 시점에 누군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주입한다면 그건 ‘들은 기억이 없는 일’이 될 확률이 크다고 했다. 깜빡깜빡한다는 이야기다. 한편 편안하게 눈을 감은 상태의 뇌파 지도를 살펴보니 전전두엽에서 나와야 하는 편안한 알파파의 양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체력과 심신이 안정됐을 땐 일 처리에 전혀 무리가 없는 상태였다. 반대로 컨디션이 떨어졌을 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후두엽 쪽에서 보여야 할 붉은 알파파 수치가 현저히 낮다는 데 있었다. 그건 쉬고 있을 때조차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피곤했던 이유는 자고 있는 동안조차 생각을 비울 수 없었던 뇌가 충분히 휴식하지 못해서였던 거다. 문득 ‘피로는 간 때문이야’라며 호언장담하던 모 자양강장제의 카피를 ‘뇌 때문이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나저나, 내겐 이런 쓰잘 데 없는 생각을 비워내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집중 질량 보존의 법칙

정리해 보면, 결국 나는 부주의하고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과한 로드를 통해 기억력과 주의력이 감퇴된 첫 번째 케이스였다. 더불어 “누구더라, 생각이 안 나. 이 안면 인식 장애를 어쩌면 좋으니?”처럼 나와 비슷한 증상을 좀 더 심각하게 호소하는 편집장의 상태와도 궤를 잇고 있었다. 그 시점, 나는 ‘머리 나쁜 사람’과 동격으로 여겨지는 ‘부주의하고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이란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고 싶어서 의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가 급기야 “당신이 가진 집중력의 양은 평균보다 낮은 편”이라는 대답을 듣고야 말았다. 이런 젠장! 질문은 이러했다. “혹시 말을 많이 하면 기억력이 저하되는 건 아닌가요? 말이란 어떤 기억과 정보를 언어로 치환해서 사용한 후 비우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많이 쓰면, 기억력이 줄어들까요. 쓰는 것에 지나치게 편중돼 기억을 나눠 쓰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자신의 집중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 그것보다 많은 일을 하게 되면 집중력이 낮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죠. 지금 검사자의 집중의 양은 정상보다 낮은 상태이니 메모하지 않고 버티는 게 오히려 도움이 안 돼요.” 결론적으로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은 보유하고있는 집중의 양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고 효율적으로 분배하거나 혹은 집중의 양을 늘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치료를 해 나가며 궁극적으로 양을 늘이지 않을 거면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를 무엇보다 잘해야 한다고 한다. “긴장이 많은 편이니 자기 전에 목 운동을 하는 게 중요해요. 누워서 팔다리를 흔들면서 몸을 이완시키는 동작을 매일 5분씩 해 주세요. 명상을 포함해서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비워내는 연습을 하는 게 좋고, 회로운동이라 부르는 무한대 그리기를 해 주면 도움이 돼요.” 불편 정도에 따른 선택적 항목이지만 자신의 기억과 주의력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 같은 브레인 트레이닝 센터 등에서 전전두엽의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뇌파 훈련과 인지 훈련을 통한 기억력 회복, 편안한 집중을 유지하는 노하우를 익힐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상태를 점검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데다 이참에 내가 가진 비루한 집중의 총량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그 양이 한참이나 남아도는 상태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훈련과정은 패스했다. 참, 의사가 외면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말을 많이 하면 뇌가 좋아진다. 여기서 의미하는 ‘말’은 문자나 톡이 아니라 대화를 의미한다. 상대를 보는 시선을 통해 친근함과 자신감, 애정 등의 감정을 전달하는 인간은 대화를 통해 전두엽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억의 빈 공간을 채워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이 저하되는 건 당연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가 하면 나이에 비례해 뇌의 기능 저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일과 개인의 삶을 연동해 나가면서 자신이 가진 집중력의 총량을 잘 계산해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까지 터득해야 한다는 사실까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가끔 기억 혹은 주의력에 과부하가 걸리는 건 마음의 문제이거나 지나치게 몰린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이제부터라도 이런 상태가 지속될 땐 전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된 건 아닌지 의심해 보고, 어떤 부분에 저하가 일어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관심 분야를 꾸준히 공부하고, 전후 맥락을 되새기며 대하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읽는 것, 책을 읽으며 요약하고 드라마보다 다큐멘터리나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습관, 초행길이 아니면 내비게이션을 끄고 주 3회, 30분 정도 빠르게 걸으려는 노력 등은 기억력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홍삼이나 브로콜리, 양배추 등의 녹색 채소를 섭취하는 방법 역시.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노력과 더불어 각자의 방법도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선택한 건 메모였다.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래버틴은 <정리하는 뇌>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마음 바깥의 신뢰할 만한 시스템에 담아내야 하는데 그 신뢰할 만한 시스템이 바로 글로 적는 것이라는 단호한 해법을 제시했다. 효율성 전문가로 <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 Getting Things Done>를 펴낸 데이브드 앨런도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일련의 메모를 ‘마음 청소하기’라고 불렀는데 3×5인치 사이즈의 카드를 준비해 아이디어나 과제를 한 장당 하나씩 적어 정리하는 방법을 전수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과제를 쉽게 찾을 수 있고 처리한 다음에는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거다. 만일 카드 숫자가 많아지면 실행할 것, 위임할 것, 미룰 것, 그만둘 것이라는 네 가지 ‘실행 가능한 범주로 분류해 정리할 것’을 권했다. 내 경우엔 포스트잇을 사용하는데 색인용으로 많이 쓰는 미니 포스트잇이 제일 편했다. 포스트잇 위에 과제를 하나씩 심플 하게 정리한 다음 책상에 앉았을 때 가장 시선이 먼저 닿는 모니터 오른쪽 테두리에 내림차순으로 붙여놓고 해결한 리스트는 떼 버렸다. 1주일 정도 해 보니 제법 효과가 있다. 누군가는 그 정도쯤이야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두를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것은 뇌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뇌파 검진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 효율성 때문이었다. 새로운 일들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디지털 시대, 수많은 정보와 선택의 과부하로 뒤엉켜 버릴 수밖에 없는 머릿속을 완벽하게 정리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뇌는 말하고 있었다. 그런 허황된 욕심은 꿈도 꾸지 말라고, 더할 것이 아니라 비우고 버려내라고.




*<ELLE Korea> 2016.04에 게재된 아카이브 편집본입니다.



COURTESY OF GETTYIMAGES(illu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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