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 감별사가 추천하는 선지해장국
선지해장국을 먹을 때는 꼭 그녀의 추천을 받으리라/위로의 해장국
어렸을 적에는 뭐든 비슷했겠지만 선지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그저 피로 만든 묵이나 두부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고 먹었다. 일상식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선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선지의 뜻에 다른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짐승을 잡아서 받은 피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우리가 먹고 있는 선지해장국의 선지의 말뜻에는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없다.
선지는 단백질 공급의 보고인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없었던 서민들의 차선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나 돼지의 피는 단백질과 철분을 보충해 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타민, 무기질도 많은 섬유소 가득한 시래기나 콩나물 등을 넣고 끓이면 일종의 보양식 겸 해장국으로도 훌륭하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고 별미인 선짓국이 그 옛날에는 귀한 음식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농담으로 술을 흘리면 ‘피 같은 술을 흘린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잖은가. 이때의 피는 귀하다는 의미가 있으니 어찌 보면 선지는 매우 귀한 음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선짓국을 우혈탕(牛血湯)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또 선지로 전유어를 만드는 방법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선지는 탕류나 전을 부치기도 한다. 대체로 소 선지는 국이나 탕을 끓이고, 돼지 선지는 주로 순대를 채운다. 사실 피순대에 선지가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선지는 신선할수록 식감이 부드럽고 찰기가 있으며 냄새가 덜 난다.
예전에는 고기를 파는 음식점이면 선짓국을 뚝배기나 작은 그릇에 담에 서비스로 내어주는 곳이 꽤 많았다. 지금도 그런 곳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곱창구이를 파는 곳은 아직도 선지를 뚝배기에 담아 푸짐하게 내어주고 원하는 만큼 리필도 해주고는 한다.
선지는 채소와 함께 끓여 국처럼 먹거나 고기를 넣어 끓여 먹기도 한다.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은 소고기뭇국처럼 맑게 끓인다고 한다. 그 밖의 선지를 이용한 요리는 못 본 것 같다. 요즘 식당에서 내어주는 선짓국을 보면 무나 콩나물을 넣고 맑고 시원하게 끓인 형태가 많은 것 같다.
해장국 전문점에서 파는 선짓국은 대체로 배추 우거지와 콩나물이 듬뿍 들어가 있고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로 얼큰하게 양념한 형태가 많다. 물론 된장만 풀었거나 무를 더 넣어 맑게 끓여 주는 곳도 있다.
나름 다양한 형태의 선짓국이 있지만 선지해장국 마니아들은 선지의 식감과 양으로 그 집의 퀄리티를 판단한다고 한다. 실제로 함께 해장국 투어를 다녔던 지인은 선지해장국을 먹기도 전에 선지의 상태를 눈으로도 감별할 정도로 선지에 진심이었다. 또 신기하게도 점을 치듯 선지의 모양새를 보고 그 맛을 알아맞혔는데 실제로 맛을 봤을 때 일치했던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지해장국을 먹으면 이런 경지에 오를까 싶을 정도다. 몹시 궁금하지만 나는 도전하지는 못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선지 요리 말고 신선한 피 그 자체를 그대로 먹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날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점점 더 육식을 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10살 남짓할 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닭은 기본이고 소나 돼지, 염소, 오리 등을 직접 도축하기도 했다. 소나 돼지는 동네에 행사나 잔치가 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날도 누군가의 환갑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이때만 해도 누군가의 환갑은 온 동네가 축하해 주던 잔치 중의 잔치였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 동네 어른들이 마당 넓은 집에 모여 돼지를 잡고 있었다. 장정의 어른 몇몇이 돼지를 묶은 채 붙들고 있었고, 한 명은 돼지의 정수리를 정으로 무지막지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한 번에 성공을 못 해서였는지 여러 번 내리쳤는데 그때마다 꽥꽥거리던 돼지를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잡은 돼지의 목을 따서 대야에 피를 받았다. 그러고선 소주잔에 한 컵씩 받아서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는데 따뜻하고 신선할 때 먹어야 몸에 더 좋다고... 어서어서 와서 먹으라고... 어린 나에게 그런 광경이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걸 보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밥상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돼지고기가 별식으로 나왔다. 온 식구들이 맛있게 먹었으나 나는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그렇게 별난 아이가 되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기억이었으나 그때 피는 신선할 때 먹어야 한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선지는 신선한 피로 삶아내야 냄새도 덜 하고 좀 더 부드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인의 어머니가 순대 국밥집을 오래 운영하셨는데 항상 피를 직접 받아서 끓이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지를 부드럽게 하는 노하우를 알려주셨다.
선지에 소주를 조금 타서 섞어두었다가 삶아내면 냄새도 덜하고 좀 더 부드러운 선지가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피순대를 만들 때도 그날 받은 선지로 만들어야 순대에서 잡내가 덜 난다고 곁들여 말씀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비단 선지만 신선해야 하나? 음식에 쓰이는 식재료는 뭐든 신선할 때 가장 제맛을 내는 법이다.
한 지인은 자신은 모태 선지해장국 마니아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유인즉슨 부모님이 엄청난 해장국 마니아여서 이유식을 떼고 일반식을 먹을 때부터 선지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매운맛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부드러운 선지 맛이 좋아서 너무 많이 먹다 보니 변비에 걸리기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지인의 언니가 증인이니 이건 명백한 사실일 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지를 먹어야 변비까지 걸리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할 즈음에 수줍은 듯한 고백이 이어졌다. 선지를 먹고 변비에 걸리면 나오는 변의 색이 무청 잎 색깔이었다고 말이다. 아니 선지해장국을 많이 먹고 본 변의 색깔까지 체크해 봤다고?? 엉뚱함에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새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에 더 얘기해 달라고 졸라댔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선지를 먹어보고 바로 소의 피로 만든 건지, 돼지 피로 만든 건지를 알아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소의 피로 만든 선지는 매우 부드럽고, 돼지 피로 만든 선지는 삶은 간을 먹는 것처럼 퍽퍽하다고 한다. 신기해하시던 어른들이 시험 삼아 좋아하는 소의 피로 만든 선지가 아닌 돼지 피로 만든 선지를 주면 뱉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 나오는 듯하기도 했다. 또 너무 부드럽고 순두부 같은 선지는 싫다면서 선지해장국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도 설파했다.
다음에 선지해장국을 먹을 때는 꼭 그녀의 추천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