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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최초가 아닌 혁신의 크기

최초라는 타이틀을 벗어날 때 무의미한 경쟁이 아닌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by Chaewon Kong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1239년 유물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에 성공한 것을 1448년으로 보는 데, 이보다 210년 가까이 빠르다.

우리는 세계 최초를 좋아한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세계 최초로 달에 간 닐 암스트롱,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 등.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을 때 파이오니어(Pioneer, 선구자)로서 그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하다. 대개 인류의 중요한 혁신은 이런 파이오니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세계 최초 타이틀과, 혁신을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를 하기 약 20여 년 전인 142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수는 불과 122권이었다. 도서관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1454년부터 1500년까지 46년의 짧은 기간 동안 유럽에서만 1200만 권 이상의 책이 인쇄되었다고 한다. 이전 1000년 동안 생산된 책이 1100만 권 정도로 추정되는데, 불과 50여 년의 시간 동안 이전 1000년 동안 생산한 양과 맞먹는 책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인쇄혁명이 좋은 쪽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보급되어 천동설에 결정타를 준 기여를 한 반면, 성직자 크라머의 <마녀의 망치>라는 책은 마녀사냥의 광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여전히 혁명이었다. 지식이 확산될 수 있는 일종의 '지식의 고속도로'가 뚫린 셈이었고,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소수의 필경사를 통제하는 교회에 의해 저작물의 간행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문맹률은 낮아졌고, 지식의 다양성은 증진되었으며 지식을 독점하던 계층의 독점권에 금이 갔다.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던 교회 권력이 몰락하게 된 계기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인쇄혁명 이전인 1298년에 세상에 등장했지만 인쇄혁명 이후 전 유럽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이 인쇄본으로 된 <동방견문록>을 읽고 항해자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인쇄혁명은 이렇듯 항해혁명으로, 상업혁명으로, 나아가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으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혁신을 낳았다.

반면,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기술은 당시의 기술적, 사회적, 언어적 한계로 인해 충분히 보급되지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인쇄 기술적 한계로 목판인쇄보다도 생산성이 낮았고, 수만 자 이상이 필요한 한자의 한계로 대량 인쇄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량 인쇄를 가능케하는 인쇄술의 혁신으로 작용하기 보다, 내구성 있는 금속을 사용해 목판 대비 교체 주기를 늘린 정도의 의의에 머물렀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역시 최초의 증기기관이 아니며, 일론 머스크의 전기차 역시 최초의 전기차가 아니다. 최초의 증기기관은 서기 1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증기기관은 부족한 기술력으로 충분한 동력을 제공하기 힘들었다. 노예제 사회인 당시의 시대상도 한몫했는데, 굳이 가축과 노예 대신 동력 기계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적었다. 그렇게 증기기관은 산업혁명기까지 1500년 가까이 긴 동면에 들어갔다.

전기차는 1881년 프랑스의 구스타브 투르베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당시 전기기술은 보잘것없었고, 상용화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후 120년이 더 지나서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가 등장하고 나서야 전기차는 비로소 시장에 받아들여졌고, 테슬라는 투르베는 하지 못했던 자동차 산업의 혁신을 이끌어내고 있다.

최초는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최초의 가치는 그것이 세상의 변혁을 불러일으키는 혁신과 결부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노벨상은 단지 최초라는 것만으로 수여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과 기여가 세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어쩌면 우리는 '최초'라는 타이틀보다 '혁신'이라는 실질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영향력,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세기이다. 최초의 신화에서 깨어나야 혁신에 집중할 수 있다. 최초라는 단어를 지나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켰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선을 옮길 때, 우리는 좀 더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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