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내 감정의 팔 할은 유럽으로부터 왔다고 단언한다. 해리포터에 미쳐있던 나는 영국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명분은 졸업기념이었다. 6학년짜리가 혼자 어학연수를 알아보고선 통보했다, ‘나 영국 보내줘’.
마침 출국은 내 생일이었다. 공항에서부터 동행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이 여행이 나의 생일선물이자 졸업선물이라고 자랑했다.
그렇게 영국과 동시에 독일, 프랑스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문제는 다녀온 뒤였다. 너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덜컥 첫사랑에 빠져버린 아이처럼 걸핏하면 울었다. 처음으로 상사를 앓았고 향수에 버거워했다. 어쩌면 곧 내 사춘기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유럽은 내게 감정의 기복을 가르쳐줬다.
매일같이 유럽 전도를 들여다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여행 책을 잔뜩 빌려봤다. 언제 갈지 모를 여행 동선을 짰다. 그러나 무용한 고민에 불과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가야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가야지,,, 그렇게 다짐한 지가 어언 10년이 지났다. 늘 유럽을 유예해왔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돈을 모아왔다. 세뱃돈이나 용돈 같이 코 묻은 돈,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틈틈이 벌어온 돈들. 지금껏 한 푼 쓴 적 없다. 이런 생각으로 모은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할 때 이 돈으로 졸업여행을 가야지’.
막상 그 때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기다려온 졸업여행, 그토록 꿈꿔왔던 유럽을 위해서다.
사실 난 바보같이 통장의 돈을 다 풀지 못했다. 정말 이 날을 위해서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모아온 돈이다. 하지만 나는 또 언제 올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유예해버렸다.
유럽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미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유럽은 그 자체로 미술이다. 유럽관광에는 당연히 클림트와 고흐가 함께한다. 모더니즘 회화는 서유럽에서 시작했고, 표현주의 회화는 동유럽을 휩쓸었다. 유럽에 대한 올곧은 외사랑은 미술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부모님은 미술을 허하지 않으셨다. 예고를 가겠다고 야밤에 목동의 공원에서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던 기억이 있다. 마침 그 공원 이름이 ‘파리’공원인건 우연일까.
그리고 또 우연히도, 난 결국 미대를 진학했다. 예상치 못하게 낮은 수능성적을 받아서라 고백한다. 내 삶 가장 큰 불운이자 행운이었다. 이 때만큼은 운명을 믿고 싶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미대를 졸업한다. 여전히 나는 미술을 사랑한다. 하지만 미술을 할 자신은 없다.
그래서 행선지를 독일로 선택했다. 올해는 10년에 한 번 오는 ‘그랜드 아트 투어의 해’이다. 5년마다 하는 ‘카셀 도큐멘타’와 10년마다 하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동시에 열린다. 현대미술의 중심과 흐름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다. 베를린과 카셀, 뮌스터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다.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유럽으로 시작했던 미술을 다시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 내가 미술을 해도 될까. 미술은 대체 뭘까, 난 미술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머리는 클 만큼 다 컸다. 예전처럼 심장이 뛰거나 눈빛이 초롱초롱하지도 않는다. 어리던 시절만큼 유럽이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이 잿빛으로 보이는 이 시기에, 유럽이 다시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줄까. 메마른 마음으로 기대를 걸어본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았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천사가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는 영화다. 천사의 세상에는 색이 없고 잿빛으로만 보인다. 그는 인간의 감각을 부러워한다. 커피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하고, 베를린 장벽 그래피티의 알록달록함을 궁금해한다.
결국 인간이 된 첫 날, 천사의 발걸음은 어찌나 가볍던지.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의 천사. 마치 말을 처음 떼는 아이처럼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신이 나 물어본다. 왠지 그의 두근거리는 박동이 나에게 까지 전해진 것 같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 사방에서 들리는 제3의 언어들, 낯선 공기. 오랜만에 내일이 기대되는 날들이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보여줄까 궁금한 마음에 달뜬 숨이 느껴졌다.
*이 글은 <아는 동네>에 2017년 연재했던 글을 재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