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껏 사랑해도 되는 도시
솔직히 말해서 미국은 총 맞을까봐 두려워서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드 처돌이로서 뉴욕에 대한 가장 큰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위시리스트로만 간직하고 있던 뉴욕행을 돌연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라는 생각으로 출국 1주일 전에 비행기 표를 결제해버렸다.
비행기 안에서는 영화 크레이지리치아시안과 어쩌다 로맨스를 봤다. 우연찮게도 둘다 뉴요커에 대한 영화다. 전자는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인 레이첼에 대한, 후자는 '누가 너랑 결혼하면 그건 비자때문이야'라는 말을 듣는 로맨스혐오자 나탈리에 대한 이야기다. 두 영화 다 웃기게도 주인공들이 뉴욕을 '더럽다'고 표현한다.
JFK is just Salmonella and despair
레이첼은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면서, JFK 공항은 살모넬라 균과 절망뿐인데 여긴 쾌적하다며 감탄한다. 나탈리의 뉴욕은 더 한다. 우선, 뉴욕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기도 하다. 심지어 지하철에는 쥐도 나온다는 후기를 너무 많이 봐서 난 가보지도 않은 뉴욕 지하철 트라우마가 있을 지경이었다.
영화 스포일러를 좀 더 하자면, 나탈리는 소매치기를 당한 후 온 세상이 로맨스 영화 자제로 변해버리는 희한한 증상을 겪는다. 거리에 꽃과 음악이 가득하고, 라벤더 향이 나는 증상. 나탈리는 이를 '뉴욕이 더 이상 엿같은 냄새가 안난다'며 당황한다.
Newyork doesn't smell shit anymore!
그런 나탈리의 반응이 웃겨서 비행기에서 혼자 킬킬대긴 했지만, 사실 무서운게 더 컸다. 아시안 여자 혼자 가는, 총기 소지의, 트럼프(가장 중요!)의 나라가 심지어 그토록 더럽기까지 하면 정상적으로 여행할 수 있을까? 설렘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14시간의 비행을 견뎌 어찌됐건 JFK에 발을 디디긴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친절한 공항 직원들과 이상하리만큼 무탈하게 입국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아주 안정적으로 맨하튼 시내의 호텔에 도착했다. 마침 6월에 pride march를 막 끝낸 뒤라 맨하튼 곳곳에는 레인보우 플래그가 펄럭이고 있었다. 모든 백화점과 명품 디스플레이가 무지개 빛으로 장식되어있는 풍경이 이 도시의 첫 인상이었다. 아주 낯설고도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타임스퀘어로 향하기로 했다.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하지만 버스를 타기엔 일정 시간이 부족했다. 난 한껏 긴장한 상태로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덥고 습한 개찰구로 내려가 메트로 카드를 구입에 도전했다. 하지만 왠걸, 현금 결제가 안 되고 카드만 가능한 기계였다. 이미 여기서 1차로 당황했다. 갖고 있는 카드를 긁자 이번엔 결제가 거절됐다고 한다. 내 멘탈은 이미 가루가 됐다. 그 때 한 흑인 남성이 다가와 뭐라 말을 걸었다. 난 소매치기 당할 생각에 가방부터 부여 잡았다.
흔들리는 내 동공을 본 그는 slow down하라며 체크카드말고 신용카드만 가능하다고, 네 카드 신용카드 맞냐고 확인했다. 그제야 나는 다른 카드를 꺼냈고, 그는 차근차근 결제방법부터 개찰구 이용까지 알려줬다. 지레 겁부터 먹었던 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난 왜 그토록 유럽에서 인종 차별을 당한 기억이 많은지. 파리는 아마 나같은 여자 애들이 워낙 많아서 캣콜링 금지법도 만들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나의 지갑을 슬쩍 갖고 가거나, 공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날 쫓아오거나, 겁에 질린 나를 비웃던 유럽에서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이 많아서일까, 뉴욕행 비행기를 용케 끊어놓고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왠걸, 이 도시는 모든 걸 무색한 기우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레이첼과 나탈리의 말처럼, 더럽고 가끔은 오줌 냄새도 나는 것도 분명하다. 마냥 유쾌하기만 한 도시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간의 방랑 끝에 나는 이 도시를 맘껏 사랑하기로 했다. 다시 뉴욕에 갈 수 있다면, 그 땐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대할 수 있을 텐데. 오직 그런 아쉬움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