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y see us, 할렘
버스투어를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는 월스트릿을 거쳐 브루클린까지, 북쪽으로는 할렘까지도 돌 수 있는 투어다. 버스 투어에는 각 국 언어 별로 가이드를 해주는 음성 서비스도 있다. 버스가 센트럴 파크에 다가설 때, 이어폰 속 가이드가 높게 솟은 건물을 보고 트럼프의 여러 호텔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호텔은 위풍당당하게 센트럴 파크를 바라보고 있다.
센트럴 파크 북쪽으로는 슬럼가의 대명사 할렘이 있다. 어릴 때부터 낙후된 지역을 칭할 때 ‘저기 완전 할렘이잖아’라고 말하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할렘은 그저 보통의 뉴욕이었다. 서울의 왠만한 거리와 다를게 없었다. 오히려 너무 멀끔해서 놀라울 정도다. 유색 인종 비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맨하튼 대부분의 거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할렘은 오바마가 나온 컬럼비아 대학교 동네 바로 위에 있기도 하다. 오바마가 당선되기 20년 전 1989년 센트럴 파크에 한 사건이 있었다. 백인 여성이 밤에 조깅 중에 끔찍하게 강간과 폭행을 당한 채 발견됐다.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구했지만, 충격으로 범인을 비롯 범행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뉴욕 경찰은 사건 시각에 공원에 있던 흑인, 히스패닉 청소년 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갔고, 그 중 5명에게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아냈다. ‘센트럴 파크 파이브’로 알려지게 된 이들은 최대 14년까지 형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도 넘게 지난 2001년에 진범이 자백을 한다. 억울하게 징역을 살던 그들은 누명을 벗었다.
마침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도 해당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어있었다. 작품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가해자로 지명된 청소년들을 악당처럼 강조한 기사들을 다뤘다. RAPES JOGGER, TEEN GANG 이라 거대하게 쓰여진 헤드라인들은 당시 언론들이 얼마나 그들에 대한 혐오를 쏟아냈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또 다른 지점을 지적한다. 당시 센트럴 파크 사건이 일어난 한 주 동안, 25건의 다른 강간 사건들이 있었고 대부분이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열 여성이었음을. 하지만 이 사건들은 언론이 다루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뉴욕 전체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트럼프는 신문에 전면적으로 그들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광고를 게재했다. CNN에 나와 원색적으로 흑인 커뮤니티를 증오하고, 언론은 다시 그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그 때 그렇게 악명을 떨친 트럼프가 이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 그를 뉴요커들은 부끄럽게 여기는지, 유난히 그를 풍자하는 기념품들이 많았다. 작은 키링 모양의 트럼프를 누르면 엉덩이에서 배설물이 나오기도 하고, ‘sorry about our president’라며 사과를 자처하는 티셔츠들도 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안티 굿즈들이다. 이토록 자유가 넘치는 도시지만, 누군가에겐 언제든지 삶을 송두리째를 박탈할 수 있기도 하다.
이제 버스가 할렘을 떠난다. 마냥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이 동네를 가로지르는 큰 대로를 따라 벗어난다. 이 길의 이름은 Malcolm X boulevard다. 이 곳에서 암살당한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엑스의 이름을 땄다.1965년의 일이다.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운동을 전개했던 마틴 루터 킹와 달리, 말콤 엑스는 뉴욕 등 도시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해방운동을 이끌었다.
루터 킹의 전기 영화를 찍었던 듀버네이 감독은 센트럴 파이브 사건을 재조명한 드라마 'when they see us'를 넷플릭스에 내놓았다. 오프라 윈프리가 이제 40대가 된 실제 주인공들을 게스트로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시류에 맞춰 한 리포터가 트럼프에게 센트럴 파크 사건과 관련해서 사과를 할 의향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없다고 대답했다. 말콤 X가 길에서 죽은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할렘과 뉴욕은 여전히 얽히고 설킨 사건들로 계속된 투쟁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