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날
"버킷 리스트를 쓴 다음에 그걸 하나씩 실천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난리법석이었던 술자리가 한바탕 지나가고 대부분의 투숙객들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지 오래.
나는 그제서야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도로 끝 게스트 하우스, 하나 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남아있는 몇 명의 사람들도 옆 사람과 제각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밤이 지나고 모두가 잠든 새벽이나 되어야 이렇게 선선한 바람이 분다는 걸, 베트남에 여행 온 지 6일째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여행자들이 북적이는 이 거리도 이렇게 조용할 수 있구나.
"아, 정말요? 어떤 버킷리스트인데요?"
"그냥 흔히 생각하는 그 버킷리스트예요. 특별하진 않아요."
딱딱한 목소리... 기분이 별로 안 좋나. 가녀린 어깨까지 내려온 수더분한 머릿결, 그 머릿결을 넘길 때마다 보인 작은 귀, 술잔을 잡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그런 그녀에게 시선이 이끌렸지만, 그녀는 술자리 내내 모두가 어울릴 때도 분위기에 구색만 맞출 뿐,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내 판단이지만.
"아하... 그럼 여행하기가 버킷리스트 중 하나?"
"뭐... 그런 셈이죠? 보여드릴까요?"
그녀는 비어있는 옆자리로 훌쩍 옮겨 왔다. 그때, 지금껏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샴푸 향기가 코를 지나 갑작스레 가슴까지 훅 밀려들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가해자인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꽤나 긴 체크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사직서 날리고 퇴사하기... 번지 점프하기... 하루에 1000만원 이상 쓰기(헉)... 기부하기..."
"평범하죠? 흔히 말하는 버킷리스트라니깐요."
"에이, 흔하다뇨. 그리고 거의 다 실천하셨네요. 남아 있는 게..."
리스트의 맨 아래, 남아있는 항목은 두 개였다. '세계일주'와 '사랑하기'.
"네, 세계일주도 거의 끝나가요. 오늘까지 무이네에 있다가 북부로 올라갈 거예요. 달랏이라는 동네에 조금 있다가 하노이로 가려고요. 거기서 더 있을지, 돌아갈지... 그건 거기 가서 상황을 봐야 할 듯싶어요."
"와... 축하드려요! 여행 중이신지 꽤 되셨겠네요."
"네, 아마... 1년 조금 넘었을 거예요. 이제는 조금 지쳐서 집에 가려고요 하하"
웃지 않던 그녀가 그렇게 웃으니,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그럼... 하나 남으셨네요?"
"네. 근데 아마 못할 거예요. 그거 때문에 버킷리스트가 끝나지를 않네요."
"네..? 왜요? 충분히 연애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술잔을 보던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아뿔싸... 말이 이상했나...
"죄.. 죄송해요. 그런 말이 아니라... 음... 충분히.. 연애하실 수 있을 만한... 아니 뭐라니."
정신 못 차리고 횡설수설하는 나를, 그녀는 빤히 바라봤다.
"연애는 해봤죠. 근데 그게 사랑은 아니잖아요?"
"그.. 그렇죠. 아~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안 해보셨다는 거구나!"
"그렇죠. 그리고 저..."
그녀는 손가락을 머리 옆에 두고 빙글 돌리며 말했다.
"사이코패스예요."
음? 잘못 들었나. 농담인가? 그러기엔 그녀의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진짜예요. 사이코패스."
아... 나 뭐 잘못했나. 말 걸지 말란 뜻인가.
"걱정마요. 누굴 해치거나 그러진 않으니깐. 그냥 감정장애? 그런 거래요. 사람들이 재밌어하는 걸, 저는 별로 재밌어하지 않을 뿐... 연애는 해봤어요. 고백받고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연락하고 하다가... 도저히 억지로는 못하겠더라고요."
사이코패스에 감정장애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녀 앞에서 거짓말 아니냐고, 반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화의 갈피를 잃은 어린양 같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그녀는
"못 믿겠죠? 다들 그런 표정이에요. 괜찮아요."
라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리곤 술잔에 남은 마지막 술을 마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내일 일정 때문에 들어가야겠네요. 내일 일정이 어떻게 돼요?"
"아... 저는 뭐... 여기 조금 더 있다가 남부 쪽으로 내려가려고요."
"아하~ 그럼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겠네요. 저는 내일 일찍 출발할 것 같아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
벙찐 표정의 나를 두고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슴까지 밀려들어온 그녀의 향기는 환풍기가 고장난 듯, 좀처럼 환기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멍하니 그녀의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이젠 정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방으로 돌아갔고 나 역시 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난 아직 여전히 그 술자리에 있는 듯 알딸딸했고, 그녀와의 대화는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몽롱했다.
그녀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세계일주는 곧 완료될 것이고 마지막 버킷리스트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관리된 듯, 안 된 듯 자연스러운 머릿결의 그녀, 그렇게 무미건조한 단어들이 나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청초롬한 입술의 그녀, 향긋한 샴푸 향기의 그녀, 하지만 사이코패스인 그녀는 과연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채울까?
침대에서 뒤척이던 나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열었다. 내 여행 일정... 음... 조금 바꾸면 어때. 나는 그녀의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어떻게 채워질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내일 여유롭게 이 도시에 머무르려던 계획은, 조금 수정되어 그녀를 따라 중부의 달랏으로 향하기로 했다. 어느덧 새벽이 지나 아침 해가 떠올랐고, 고요하던 도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오토바이들의 클락션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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