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아버지의 초상
승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말씀드릴게요.
좋은 물건 가지고 나왔거든요.
예, 예, 고맙습니다.
오늘은 우비 가져왔습니다. 최고급 우비예요.
요즘 같은 장마철에 집에 우비 하나씩 있으면 좋잖아요?
우리 엄마 아버지 소풍, 등산 좋아하시고
요즘 젊은 친구들 캠핑도 많이 가잖아요.
그렇게 야외활동 다니실 때
아니면 우리 어르신들 마실이나 잠깐 밭일 나가실 때
우산 대신 그냥 이거 하나 챙겨서 나가시면 얼마나 좋게요.
좋은 원단 써서 폭풍우가 쏟아져도 물이 안 새요.
태풍 와도 그냥 이거 하나 입고 출근하시면 돼요.
원단을 중국산 안 쓰고 아주 좋은 거 써요.
보세요, 이렇게 쭉쭉 당겨도 안 찢어져요.
튼튼하고 오래 갑니다. 하나 사두면 몇 년씩 입어요.
오염도 안 돼서 우리 어머님들 빨아서 쓸 필요도 없고
그냥 비 오면 꺼내서 입으셨다가
비 그치면 말려서 보관해두시면 되는 거예요.
색깔은 하얀색 노란색부터 보라 초록 파랑 핑크까지 다 있어요.
맘에 드는 거 고르시면 드릴게요.
이거 밖에서 사시면 만 원도 넘는데
오늘은 그냥 오천 원짜리 한 장만 주세요.
단돈 오천 원에 드려요.
말씀하세요. 드릴게요.
오천 원. 오천 원이에요.
예. 오천 원이요.
오천… 원이요.
근데 오늘은 비가 안 오네요.
우비 잔뜩 싣고 나왔는데,
씨팔 장마라면서 왜 또 해가 쨍쨍해요.
지금 바로 내리라고요?
그럼 나 잠깐만 좀 쉽시다. 잠깐 좀 앉아 있다가 갈게요.
거참 알았다니까요. 다음역 도착하면 내릴게요.
여보세요. 어, 아들. 얼마? 얼마라고?
그래. 알았다. 알았다, 아들.
걱정하지 마라. 비는 곧 올 게다.
비가 안 오면 소금이라도,
소금이 없으면 햇빛 한 줌 구름 한 덩이라도 떼다가 팔 테다.
걱정 마라. 걱정할 거 없다. 아빠 괜찮다.
그러니 승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말씀드릴게요.
예, 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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