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판> 리뷰
고백하자면, 나는 이야기주의자다. 이야기로 세상을 읽는 일들을 좋아하고, 세상을 이야기로 쓰는 일들을 사랑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벌어진 사건의 기록이 이야기라면, 삶이라는 조건 안에서 당신과 내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이야기다. 이야기는 삶보다 자주 과장되고 허황되고 왜곡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것의 가장 깊숙한 곳에 삶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예술이라면 언제나, 분명히, 만나봄직할 거라는 생각.
뮤지컬 <판>을 본다.
19세기 말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그곳에 삶은 없고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를 따라 사람들이 모이고, 은밀하게 열리는 이야기판을 드나드는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난과 질병과 부조리한 일들로 삶이 망가진 곳에서 이야기는 더욱 풍부하고 날카로워진다. 조선의 서민들은 이야기가 주는 통쾌함에 의탁해 숨 막히는 삶을 버텨나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버티게 하는 통쾌한 이야기는 그 반대편에 서있는 누군가, 특히 삶의 양식을 만들고 누리는 이들에게 불편한 이야기가 될 테다. 예리하게 벼려진 이야기는 삶이 망가진 이들을 지키고, 삶을 망치고 있는 이들을 찌르는 것.
현실에 저항하는 이들은 이야기를 만들고, 현실을 보수하는 이들은 이야기를 탄압한다. 그러나 삶을 담은 이야기는 삶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으므로, 패관소설 금지령을 내리는 사또(김효성)의 시선을 피해 춘섬(김아영)이 은밀히 운영하는 매설방에는 늘 청중이 넘쳐난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가난의 간극이 현실과 이야기의 차이를 가르는데, 부를 가진 자는 현실만이 즐거울 뿐이고 가난에 허덕이는 자에게는 이야기가 구원인 것. 그러므로 풍족한 현실에 몸담은 부잣집 도련님 달수(현석준)가 매설방에서 소설을 필사하는 여인 이덕(박란주)을 만나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드는 일은 그야말로 우연이 만들어낸 이야기적인 사건이다.
달수는 현실의 경계에 머물던 인물이다. 현실의 재력과 권력을 가진 양반가의 자제이나, 정작 그러한 현실 유지의 조건인 과거시험에는 무관심했던 것. 달수가 희대의 전기수 호태(김태곤)을 만나 '낭독의 기술'을 배우게 되는 것은 이야기적인 우연이지만, 그가 이야기패와 함께 음란하고 통쾌하고 풍자적인 소설들을 읽고 또 읽어주면서 그 이야기들이 삶과 맞닿아 있음을,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서민들의 생명과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체험하는 것은 현실적인 필연이다. 이야기패의 몸과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소설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쾌"한 체험을 하게 된다.
어떤 이야기는 현실의 벽을 두드리며 울리고 퍼진다. 사또―권력의 폭압에 맞서 소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절실한 이야기판을 펼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달수와 이야기패는 당대의 고통과 슬픔에, 철저한 계급과 신분의 장벽에, 이야기라는 칼로 부딪힌다. 그 칼에는 쾌락과 저항과 사랑 따위의,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개인의 사랑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당대의 아픔에 대한 지극한 은유로 끝날 때, 그 은유의 과정을 장단과 노래와 몸짓으로 함께 공유할 때, 무대 위 <판>의 훌륭한 이야기는 매번 다시 쓰인다.
'슬픔을 잊고 웃음을 읽는 일'이라고 정의돼야 할 때 이야기는 슬프다. 그러나 우리의 많은 이야기가 아직 그렇다. 여전히 뻐꾸기는 날아올라 지저귀고, 사람들은 웃고 울며,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꿔 이어진다. 이야기는 지키고 무찌르는 아름다운 칼이다. 더 이상 현실이 슬프지 않은 날이 올 때까지는 그래야 할 테다.
*원문: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9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