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정,『fin』(현대문학, 2025)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반복되는 시간성과 여기와 거기, 거기와 저기로 움직이는 공간성의 결합.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 위에서 우리의 삶은 존재하게 된다. 삶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함께 필요한 예술의 종류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연극이고, 그러므로 연극은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예술이 될 테다.
그리고 여기, 연극이 끝난 후 조명이 꺼진 무대에 다시 오른 네 명의 주인공이 있다. 강인하고 불안하며 한심하고 그럴듯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강인하고 불안하며 한심하고 그럴듯한 무대, 그곳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소설의 형식을 빌린 연극이 재현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는 관객석이 아닌 어둡고 편안한 곳에서 차분히 관람한다.
위수정의 소설 『fin』(현대문학, 2025)를 읽는다.
이게 시작일까? 무엇의? 이 환호는, 이 커튼콜은, 금방 끝날 텐데. 막이 내릴 텐데. 이것은 시작이 아니라 끝일 텐데. -p.11
마지막 공연을 마친 기옥은 끝을 확실히 예감한다. 예정된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는 소중한 안도감보다는 무대 위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13쪽)할 것만 같은 기묘한 종말의 예감이다. 오랜 시간 배우로 경력을 쌓으며 부와 명성을 얻었던 기옥이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 믿었던 연인의 배신, 불안을 이기지 못해 손대고 말았던 마약과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던 불륜 스캔들까지, 배우로서 무대에서 재현했던 사연들보다 더 극적이고 가혹한 일들이 무대 바깥에서 벌어져왔던 것. 어느덧 중년의 배우가 된 기옥은 개인적인 상처까지 노출해야 하는 배우의 숙명 속에서 시달린다. 가까이서 보는 그녀의 삶은 아픈 과거가 곧 현재가 되어버린, 무대의 삶과 무대 바깥의 삶이 뒤섞인, 한 편의 비극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녀는 충분히 원숙하고 좋은 배우이므로, 끔찍한 삶의 비극을 연기처럼 능숙하게 이어나간다.
선생님은 실패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 같아요. -p.81
기옥이 무대 바깥에서 삶의 끔찍함을 재현하고 있을 때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윤주가 있다. 기옥의 매니저로 일하며 스케줄부터 일상까지 돌보고 있는 윤주는 “월급 제때 주시고, 보너스도 주시고, 맛있는 것도”(49쪽) 주는 기옥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을 받는 주인공 기옥에 대한 표면적인 감정 아래 억눌린 욕망 또한 존재하므로, 윤주 또한 자기 삶의 충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옥은 언제든 부른다면 윤주가 “그래도 올 것”(56쪽)이라고 믿지만, 주인공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또 다른 주인공의 내면이 존재한다. 윤주는 기옥이 가진 것들 중에서 자신이 가져도 되는 것들이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기옥이 당연한 듯 누리는 것들―100분에 40만원이나 하는 마사지나, 존재하는지도 잊어버린 채 방치한 보석들― 중 일부는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고 믿는 것.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값진 건지도 모르고, 그것들이 명백한 성공의 증표라는 사실도 애써 무시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기옥의 비극미를 윤주는 몰래 조롱하며, 욕망한다. 기옥의 그림자 아래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희미해져버린 스스로에게 다시 높은 구두를 신겨주면서.
내 눈이 이 모든 피날레를 담도록 내버려두기로 하고 나는 퇴장한다. 박제된 광대로서, 커튼콜이 없는 세계로, 박수도, 야유도 없이. 가족도, 신도 없이…… 암전. - p.143
기옥과 같은 무대를 내려온 배우 태인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 “더없이 예의바르고 수줍어하며 낯을 가리는” 얼굴과 “진짜 미친놈들의”(22쪽) 얼굴. 매니저들에게 오만 원 권 몇 장씩 흔쾌히 쥐어주는 관대함과, 술에 취하면 서늘한 눈빛으로 불쾌한 언행을 숨기지 않는 무례함을 동시에 지닌 그는 성공의 궤도에 확실히 안착한 전형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 연극 무대를 전전하며 궁핍했던 시간을 이겨내고 유명 배우가 된 태인에게는 기옥과 같은 불안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것은 당연하게도, ‘제4의 벽’ 뒤에 앉아 삶의 어느 한 면을 재현하고 있는 배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일 뿐이다. 마지막 공연의 뒤풀이 후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가 감추고 있던 삶의 뒷면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테다. 다만 “적어도 연기할 때는”(116쪽) 본심을 드러냈다는 그의 죽음은 삶의 본질에 대하여 묻도록 연출된 극적 충격이 된다. 연기가 본심일 수 있을까. 본심을 연기한다면 그것은 연기일까, 본심일까. 삶의 본질은 연기와 본심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무엇일까.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 그게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 p.137
어느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욕망이다. 무언가 성취하고픈, 잃지 않고픈, 혹은 찾아내고픈 강렬한 욕망. 그러나 “무언가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을 모른 척”(99쪽)할 수 있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욕망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욕망을 인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인의 매니저인 상호는 가난한 환경과 타고난 성정에 굴복하면서 욕망을 조절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언제나 “마음을 아껴두”(100쪽)는 것이 당연해져버린 상호에게 유일한 꿈이 있었다면, 그것은 배우가 되는 것. 태인의 대본 연습을 도와주며 연기 호흡을 맞출 때 그는 뜨거움을 느낀다. 상호에게 끔찍한 고용주인 동시에 동경하는 존재인 태인이 앓던 삶의 통증, 그리고 그의 허무한 죽음을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비극을 통해 나에게 찾아오는 희망이다. 상호는 이제 타인의 삶에 종속된 채 허무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누군가의 지시만 “기다리는 일을 그만하고 싶”(138쪽)다는 욕망을 아껴두지 않을 테다.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페어로 얽혀서 복잡하게 작동하는 이야기를 읽는다. 우리의 삶을 빌려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어쩐지 이 연극 속 주인공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처럼 느껴진다. 욕망하고, 상처 받고, 괴로워하는 인물들. 이토록 난처한 인물들만이 희극과 비극의 뚜렷한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와 같은 “정상인은 연극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76쪽)는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본심으로 대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지극히 정상이며, 동시에 각자의 욕망과 상처와 통증과 회복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비정상이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얽히고설켜 우리도 삶이라는 긴 여로를 걷는다. 막이 내리기 전까지 욕망하고, 상처 받고, 앓다가, 나아지길 반복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연극의 주인공이다.
*원문 출처: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