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낭만적인 개소리>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된 바, 개소리는 여기저기에 만연하다. 의도가 비현실적이거나 의도를 제대로 담지 못해 빗나가버린 수많은 말이 있을 텐데, 그중 특히 어떤 말들은 너무 쉽게 개―소리라는 비인간적 음성으로만 치부되고 만다. 누구도 그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 소리, 그럴 필요가 없는 소음으로서의 말.
세상에 여러 종류의 개소리가 있고, 그 소리―아우성 혹은 비명―를 특별히 예민하게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 간절한 외침을 도저히 ‘당치 않은 말’로, 사람의 언어가 아닌 개―소리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한 흔적을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세상에 내보일 때, 그제야 우리는 만연한 개소리의 선명한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된다.
연극 <낭만적인 개소리>를 본다.
공장 굴뚝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던 노동자 진옹과 수인은 함께 농성을 하다가 얼마 전 지상으로 내려갔던 성호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삭막한 공중(굴뚝)에서 살아남던 이가 지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은 지상 또한 공중과 다를 바 없는 처절한 지옥이라는 은유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정신적 지주이자 가장 친한 동료였던 성호의 사망 소식은 오랜 농성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진옹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됐을 것. 길었던 농성이 무의미할 것이라는 자각에 괴로워하는 진옹과, 그런 진옹의 마음을 다잡으려는 수인의 갈등 속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이제 두 사람은 그리운 지상으로 내려간다. 1년이 넘는 투쟁 끝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사측의 약속을 성취한 진옹은 모두의 축하 속에서 승리감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 경찰들이 진옹에게 찾아와 각종 법조항을 들이밀며 그를 체포한다. 생계에 대한 위협과 자본―권력을 통한 회유. 이제 더 무자비하고 고통스러운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될 것이고, 노조의 수장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기 이전 또 다시 시작될 고통이 두려운 개인으로서, 진옹은 사측의 회유를 받아들여 인원 감축에 앞장선다.
자본이 유일한 힘이 된 사회. 피 흘리는 투쟁 끝에 전투에서 이긴다 해도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개인이고 노동자다. 그러므로 누군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반드시 정의가 승리한다’, ‘끝내 우리가 이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개소리가 되고 마는 것. 차가운 현실적 조건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낭만이라고 한다면, 낭만과 개소리는 동의어다. 진옹을 향한 동료들의 실망과 설득, 아내의 진심어린 만류와 위로조차도 진옹에겐 이제 모두 낭만적인 개소리, 개소리적인 개소리처럼 들린다.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정치뿐일 텐데, 자본은 오히려 정치와 결합해 그 거대한 힘을 키운다. 그 괴물은 결코 노동자―약자의 편이 아니며, 동시에 노동자 또한 온전한 노동자의 편일 수 없게 만듦으로써, 약자에 대한 더 철저하고 교활한 소외를 만들어낸다. 믿고 의지했던 진옹의 퇴직 제안에 동료들이 상처를 입고, 좌절하고, 죽어가는 것처럼. 노동자가 노동자를 죽게 만드는 끔찍한 구조를 만든 후 뒤에서 팔짱 낀 채 끔찍한 웃음을 짓고 있는 권력의 폭주를 우리는 막을 수 없을 것인가.
우선 이렇게 말하자. ‘축지법’과 ‘비행술’을 익혀 악당을 무찌르는 ‘로봇 태권브이’의 신화는 이제 없다고. 언제나 승리하는 정의의 용사는 없으며, 약자는 아주 가끔 이기고 더 자주 패배한다. 극중 노동자 투쟁의 상징이었던 진옹이 그랬고, 현실을 사는 수많은 우리가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항을 멈추지 말 것. 약한 힘을 모아 큰 힘을 만들고, 가슴 벅찬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춥고 외롭고 위태로운 굴뚝에서 들려오는 비언어적 신음―소리를 함께 듣고 응답해야 한다. 개소리에 자세히 귀 기울일 때 세상에는 무언가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개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정확한 사람의 소리였으므로.
*원문: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