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by 차구마

오늘은 멍한 머리로 멍청한 글을 쓰게 될 예정이다. 어젯밤엔 사람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공기가 좋아서인가. 육지에서 술을 마셨을 때보다 숙취가 약해 오늘은 하루가 견딜만하다. 머리가 멍해 낮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한참을 뒤척였다. 비가 들이칠까 창문을 열지 못해 방 안이 덥고 습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밖엔 세찬 비바람이 시원하게 몰아치고 있는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온도 차가 크다. 시원한 밖을 두고 더운 방 안에 갇히니 오늘은 유배답다. 프에 식구들이 없어서 혼자 인스턴트식품을 꺼내 대충 밥을 때우니 더 유배 같다.


제주에 와서 벌써 두 번째 태풍을 겪는다. 태풍이 발생해 지나가는 경로에는 언제나 제주도가 있다. 큰 바람은 제주를 자주 훑고 지나간다. 육지에서 태풍 소식을 전하면 맨 먼저 바람에 휩쓸린 제주의 풍경이 나온다. 태풍이 반도를 비껴가면 육지 사람들은 뉴스로만 바람을 본다. 제주는 늘 온몸으로 바람을 본다. 나는 성난 바다의 몸부림으로,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리는 나무들의 머리카락으로,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로, 제주에서 제주의 바람을 본다. 오래 보고 자주 보니 바람에도 정이 든다. 육지에서 뉴스로 제주의 바람을 볼 때 나는 조금 슬퍼질 것 같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인상이 강렬하다. 파도가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강한 바람 한 줄기가 파도의 옆구리를 거세게 두드리면 파도는 공중에서 부서지며 하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파도의 일부는 해안가에 가닿고 흩날린 파도는 다시 파도 속으로 섞여 다음 파장이 된다. 파도는 들이치고 물러가길 끝없이 반복한다. 바람이 부는 한 포기가 없어서 파도는 더 무섭다. 에서 보는 바깥의 파도는 경이로움이고, 밖에서 보는 바깥의 파도는 두려움이다. 경이로움과 두려움으로 순한 바다 사람들의 안녕을 기도했다.

태풍은 루사인지 매미인지 하는 이름들로 기억된다. 태풍은 날 때부터 이름이 정해져 있다.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나라들이 태풍에 붙일 이름을 정해놓고 태풍이 발생하면 순서대로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 얼굴도, 손발도 보지 않고 순서대로 가져다 붙인 이름이라 태풍의 이름은 철수, 영희, 순희 같은 사람의 이름보다 못하다. 이번 태풍의 이름은 미탁이다. 태풍이 전혀 미탁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나였으면 휘익이나 툭탁이라고 붙였을 거다. '18호 태풍 툭탁이가 북상하고 있습니다. ' 뉴스만 들어도 바람의 얼굴이 그려질 것 같다.

10/3

태풍이 물러간 뒤에도 제주엔 바람이 분다. 태풍 뒤의 바람은 날카롭지 않고 선선하게 분다. 모진 바람을 견뎌낸 제주는 새롭고 신선하다. 흔들려도 일어나는 제주의 정신은 바람에 중심이 있다. 제주에 좋은 바람이, 사람과 애정과 젊음과 행복의 바람이, 더 많이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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