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농산물 매장에 출근해 파리와 모기를 함께 날리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날이 맑고 덥다. 매장이 위치한 상모리는 배 타고 마라도를 가거나 걸어서 송악산을 오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정을 떠나는 길에서 사람들은 귤을 찾지 않는다. 귤과 장사꾼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손님들의 발걸음은 무심한 한 낮의 제주다. 밖에 전시해 둔 귤이 햇볕에 덥혀진다. 하나 까먹은 귤 맛이 달고 뜨겁다.
선풍기 앞에 하릴없이 앉아 어제를 곱씹는다. 마을 어머니들과 약밥을 만들었다. 쌀과 계피가루와 설탕을 물과 함께 섞은 후 참기름을 더한다. 고구마도 썰어 넣는다. 밥솥에 안쳐 밥처럼 찌면 짙은 갈색의 윤기나는 약밥이 뚝딱하고 완성된다. 약밥을 쟁반에 펼쳐 식히고 떡처럼 모양을 잡으면 우리가 알던 그 모양과 맛의 약밥이 된다. 어머님들의 손은 눈보다 빨라서 일손을 도우러 온 청년들의 느리고 투박한 손놀림은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주신 음료를 홀짝이고, 귤을 하나 까먹고, 어머님들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가끔씩 맛을 보는 일이 젊은 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의 거의 전부였다.
우리는 약밥이 쪄지길 기다리며 어머님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제주의 방언은 서울과 거리가 멀어 내용을 어림하기도 어려웠다. 완? 꽌? 등 짧디짧은 어미로 끝나는 제주의 말 속에 정겨움, 노여움, 뒷담화까지 다 들어 있었다. 어머님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깔깔거렸고, 우리는 대화 내용은커녕 한국말이 맞는지조차 의아해하면서도 괜히 따라 웃는 저희들의 모습이 우스워 킥킥 거렸다. 약밥 짓는 냄새와 어우러진 웃음소리가 고소했다.
어머님들이 챙겨주신 약밥을 푸짐하게 싸들고 캠프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들에게 제주의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전통적 가정 형태를 깨며 큰 변곡점을 맞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보수적으로 남아있는 섬. 그 섬에서 나고 자라고 결혼한 아내, 어머니, 여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 조금 전 약밥을 지어주시던 어머님들의 이야기. 거의 모든 제주 여자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놀랍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 놀고 먹고 외도하고 도박하는 지아비의 밥상을 차리려, 죄없고 불쌍한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 밭으로, 시장으로, 때론 바다 속으로 향하는 섬 여성의 삶. 외부에선 한없이 강하고 억척스럽고 지혜롭고 현명한 여성이지만 집에선 말없이 밥과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하는 희생밖에 남지 않은 삶. 그런 고지식한 삶의 풍경이 아직도 이 섬엔 남아 있다고 했다. 어머님들의 사람 좋은 웃음과 억척스러운 말투와 따뜻한 손 맛이 떠올랐다. 약밥의 달큰함이 아직도 입에 남아 그들의 쓰디 쓴 삶의 궤적을 감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캠프로 향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차고 습한 바람을 맞을 뿐이었다.
이 섬을 빚고 한라와 백록담과 99개의 봉우리를 만들었다는 제주 신화 속 설문대 할망도 하늘에서 내려온 자애로운 여신이었음을, 이 섬은 오랫동안 잊고 있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