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것을 뭉개고 있지는 않은가
언젠가 이직한 회사에 첫 출근을 해보니, 휴게 라운지에 아주 복잡하게 생긴 커피머신이 있었다.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아무리 째려봐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르겠어서, 하루이틀 난감해하다가 커피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출근길에 카페에 들러 테이크아웃을 해왔다. 며칠쯤 지나서, OO님 라운지 커피 내려서 같이 미팅해요,라고 누군가 얘기를 할 때 아차했다. 그제서야 아, 제가 라운지 커피머신을 쓸 줄 몰라서요.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왜인지 그때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민망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정말 어려울 것이 전혀 없는 놀랄 만큼 간단한 작동방식이었다. 첫 이직이라 너무 긴장해서였을까, 물어볼 것이 많으니 이런 질문까지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을까, 괜한 쓸데없는 생각에 며칠을 커피 때문에 난감해하다니, 그 자체가 다시 민망해졌다. 딱 한번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걸 며칠을 뭉개면서 찝찝해하다니, 그것도 중요한 것도 아닌 일에서.
주말에 한 자격증 시험을 보고 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약간의 암기를 요하는 객관식 사지선다형 시험이었다. 이 시험이 담고 있는 공부는, 일을 하는 내내 저거 한번 공부해둬야 하는데, 찝찝한 마음만 가지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게까지 필요는 없다는 핑계로 요리조리 피해왔던 공부였다.(바빴던 것도, 그렇게까지는 필요가 없는 것도 맞기는 하다. 어쨌든) 그런데 웬걸. 내가 무시하고 모른 척해서일까. 이 공부의 주제는 틈만 나면 내 앞에 나타났다. 몰라도 다른 방법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경우에는 임기응변으로 다른 방법으로 대처했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경우에는 이걸 잘 아는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요청, 부탁했다. 그 정도의 아쉬운 소리를 할 안건이 아닌데, 계속 찝찝하게 내 앞에 나타나 등줄기에 약간의 땀이 나게 하던 안건이었다. 아 이제 피하는 것이 더 힘들구나,는 생각을 했다. 한두 달 정도 출퇴근길, 점심시간을 쪼개서 공부했다. 아직 시험결과는 안 나왔지만 적어도 불편해하던 어젠다에 대해 충분히 공부를 했다.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이 안건이 또 내 앞에 나왔을 때 부탁하지도, 민망해하지도, 불편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계속 찝찝했던 것, 불편하던 것을 클리어하는 데에서 한 발짝 나아간다. 대부분은 큰 무언가가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을 그냥 뭉개거나, 얼버무리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냥 한 두 번 내 앞에 나타나고 말겠지,라는 생각도 있고, 어떻게 다 하면서 살아,는 안일한 생각도 있다.(노는 것은 대부분 다 하면서 살려고 하면서). 이런 것은 대부분 무지를 드러내야 하거나, 처음 이것을 알고 익숙해질 때까지 잠깐의 민망함이나, 노력이 필요한 경우다. 사소한 것에서 큰 것까지 크기는 다양하나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내 앞에 불시에 나타나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몰라도 어찌어찌 살아진다. 다만 불편함과 민망함이 계속된다. 그런데 편하고 잘하는 것도 맨 처음 이 불편하고 찝찝한 그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너무 편하고 잘하기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계속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를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에잇, 하는 마음으로 해버리는 것과, 계속 찝찝해하고 뭉개는 데에서 차이가 생겨난다. 주말 시험을 보고 오는 길, 후련한 마음에 다시금 반성했다. 혹시 내가 뭉개는 다른 무언가가 별것도 아닌데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불필요한 커피테이크아웃을 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커피머신은 의외로 간단하다. 뭉개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