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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Oct 06. 2020

불안을 타고 날아오르는

작년 1월부터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버스를 타고 우리 마을 읍사무소 앞에 내려 은행, 분식점, 허름한 빌라 골목을 조금 걸으면 나의 일터가 나온다. 하교 후의 아이들이 북적이는 곳. 00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돌보는 것이 나의 업무다. 휴게시간 미포함, 일 4시간 근무 비정규직으로 시간이나 업무강도, 적성경력까지. 지금의 나의 환경과 여건에 꼭 알맞은 고마운 일자리다.

아이들은 센터에 오면 간식을 먹고 요일별로 짜인 프로그램이나 공부를 하고 놀다가 저녁을 먹고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25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모여 반나절을 보내는 곳이니 날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간혹 삶의 무게와 사연들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모두 어여쁘고 생기롭다. 아이들에게 이곳은 제2의 집과도 같다. 코로나 19로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도 센터는 계속 운영되었는데 소외계층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은 센터에 오지 않으면 종일 혼자서 끼니를 챙길 수도 없고 원격수업을 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센터에는 나 말고도 여러 선생님들이 오고 가는데 그중에 가장 부러운 이들은 시청 소속의 무기직 교사들이다. 비정규직으로 살아보니 세상 제일 부럽고 대단한 존재가 정규직이나 공무직이다. 그래서 아, 나도 진작 좀 알아볼걸 한탄도 해본다. 그러나 이 자리를 얻기까지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생각하면 행운 중에 행운이었다. 젊은이들도 취업하기 힘든 시기에 마흔 넘은 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부지원 한시적 사업이나 동네 가게의 아르바이트 정도일 것이다. 20대 때도 안 해본 취준생 노릇을 마흔 넘어하면서 경단녀의 비애를 톡톡히 맛봤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경단녀라는 말을 붙일 만한 자격도 내겐 없었다. 이 사회가 원하는 경력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일을 시작하면서 나의 하루는 조금 더 소중해졌고, 꼭 그만큼 더 불안해졌다. 하루 중 고작 4시간 30분이 달라진 건데 나의 세계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균열이 가더니 전에 없는 다른 세계가 찾아왔다. 15분여간 버스 차창 밖 흔들리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듣는 흘러간 노래들, 일주일에 한두 번쯤 들러보는 카페의 커피 한 잔, 집에 돌아와 현관 비번을 누를 때 다다다다 달려오는 나의 아이들 발소리에 뛰는 심장. 조금은 아름답고 조금은 서글픈 새로운 세계.

왜일까. 왜 마냥 소중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불안하고 서글퍼지는 걸까.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매 순간 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란 것을 체험해보는 시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쯤, 어떤 똑똑한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규직에 대한 의견을 듣게 되었는데


"기업이 점점 더 비정규직을 늘려가면 말이야, 이 사회는 점점 더 불안해지게 되는 거야. 그렇게 가정이 무너지고 회사가 무너지고 그러다 점점 이 나라가 무너지게 될 거야, 불안으로!"


사실 그 여자애는 어디든 지원만 하면 정규직이 될 법한 고 스펙을 가진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쪼끔 놀라웠다. 저런 게 바로 다 가진 자의 여유인가?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기를 쓰고 노력해했어야 할 나는 당시에 물론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고용노동환경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친구들 중에 아직까지 일을 하는 친구가  명뿐이고 그나마 그중 한 명만 정규직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서 지난한 과정 끝에 정규직 직장을 가지고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올려 만족할만한 경제활동을 해나가는 친구가 없었다 게 바로 내가 가진 교육 문화 경제 환경 수준의 민낯일지도 모른다. 부자도 아니었고 좋은 학벌도 아닌데, 미래를 위한 절절한 노력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얻은 비정규직은 보수나 여건이 열의를 가지고 지속할만한 의미가 없으니, 결혼 출산을 하면서 쉽게 관두고 마는 총체적 난국. 어쩌면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주체적인 인생을 살 의지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철이 덜 들어서였나. 이제 와서 정규직을 부러워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는데 그래도 부럽다! 를 외치는 나에게 누군가 그랬다. 네가 정규직이 되는 시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의미가 없는 시대일 거라고.  

내가 의문을 가지게 된 것 이 지점이다.

왜 나같이 직업의식이 전무했던 사람마저 정규직이 부러워서 안달이 나게 된 걸까.

생활에 쪼들려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그것도 맞다. 그러나 그보다 강력한 이유는 끝없는 불안함 때문이다. 가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무런 보호막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거라는 불안함, 이대로 살다 간 노후에 폐지를 줍게 되고 말 거라는 불안함, 우리 아이는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 그놈의 불안 때문이다.

​나에게는 거창한 경제논리라든가 철학이 없다. 다만 고용안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대가 이 작고 지루한 마을에 사는 40대 주부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 뿐. 안함으로 인해 나는 인생의 그 어떤 시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다. 전공과 전혀 상관없지만 이 일에 필요한 국가자격증을 하나 취득했고 또 다른 자격증을 따기 위해 지금도 공부 중이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 되었고 그것이 나쁘다가도, 나쁘지만은 않게 되어버렸다. 


인터넷에서 '공적의식과 사적이해가 충돌하는 대한민국' 이라는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집값은 떨어져야 되는데 내 집은 올라야 하고, 중소기업 키워야되는데 나는 대기업 다녀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하지 말아야 하지만 정규직은 되어야 하고' 와 같은 글귀었다. 이거 바로 나네. 씁쓸하지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불안함으로 멍드는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아들에게 틈나면 그런다. 

넌 나중에 공무원 되어서 주말에는 취미 활동하면서 살면 좋겠다, 그게 제일인 것 같아. 아들은 말한다.

엄마, 나는 래퍼가 되고 싶은데?

헐, 쯧쯧... 고개를 젓다가 조금 놀란다.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줄 알았던 내가 어쩌다가 이리되었는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더니 그 말이 딱이. 참고로 우리 남편은 내가 정규직으로 평생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며 알려주었는데 이름을 '규직'으로 개명하란다. (내 성은 '정'씨임) 웃다가 심각해졌다.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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