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30년 넘게 제사를 지내오셨다. 아니 30년 넘게 혼자서 제사상을 차렸다는 말이 더 맞겠다. 둘째 며느리였지만 맏며느리의 부재와남편의 남다른형제애,양반집안이라는 무논리 전통 덕에 제사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나어릴 적에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한동안우리 집 안방한쪽에 작은 상을 차려놓고 매일 삼시세끼 때에 맞춰 밥과 국을 올리고 절을 올리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유교문화가 철두철미한 집안이었다. 그렇게 삼십 년 넘게 엄마는 시 증조부모와 시부모, 큰 형님의 기일과명절 때마다제사상을 차리기 위해고생을 하셨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19평 주공아파트 5층에 살았는데 계단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며장을 봐오고 음식을 만들어 스무 명쯤은 가볍게 넘겨 모이는 친척들에게 대접을 하는 그 고된 일을 엄마 혼자 어찌했나 싶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졸이고 부치고 삶고 끓이고 하다못해 모양도 크기도 보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어쩜 그리 손많이 가는 것들인지. 심성 고운 고모들이 일찌감치 오셔서 거들어 주시긴 했으나 어린 내가 봐도 울 엄마의 엄마 아빠도 아닌데 왜 저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다. 게다가 엄마를 비롯한 고모들, 그러니까 집안의 여자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였는데 남자들 때문에 이 가혹한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이기도 했고, 그렇게 때마다 왁자지껄 모이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제사 노동에 대해서 항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결혼해서 첫 아이 낳고 돌 때쯤 되었을 때 엄마는감기가 통 낫질 않고 온몸이 아프다 하시더니 응급실에 가셨고 급성신부전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투석환자가 되신 것이다. 때마침 할머니 제사가 돌아왔을 때였는데 매일 하루 세 차례 투석을 해야 하는 며느리가 제사를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자연스럽게 엄마의 30년 간의 제사상차리기 임무는종료되었다.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아버지를 비롯한 그 누구도 제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다들 그동안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 누구에게도 제사를 지속할 명분이나 기꺼이 수고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건 확실하다.
그렇게 하늘이 무너져도 지내야만 했던 제사가 며느리의 병환으로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 분명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그것이사실은 여자 한 명의 노동력에만 온전히의지해왔던것이라니. 너무나 연약하고 불평등한 세계의 실체가 그제서야 확실하게 드러났다.
엄마는 그렇게 제사를 투석과 맞바꾸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시다가삼 년 후 아들에게 신장 이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잘 이겨냈기에 이제는 추억으로 쓰지만 우리 가족에게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도 엄마는하나님께감사드림과 동시에 그놈의 제사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원망하다가 또 그래도 제사를 잘 지냈기에 복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셔서 날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곤 한다.동생과 나는 모두 기독교이고 배우자와 그 가족들 또한 기독교이기에 이제 우리 집안에서 제사는 흘러간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아빠의 1주기 때도 가족끼리만 추도예배를 드린 후에미리 준비한 추모영상을 함께 보고아빠가 좋아하시던 해물칼국수를 시켜먹었는데 엄마는,
"아이고 그동안 수없이 제사상 차렸는데 정작 너네 아빠는 제삿밥도 못 얻어먹고 훌쩍, (일동 긴장) 이렇게 좋아하던거 시켜먹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아~"라고 하셔서 모두들 웃었다.
더할 나위 없는 추모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몸의 기억이란 것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해서 가끔 엄마의 노동으로 얻어먹은 제삿밥이 생각나곤 한다.
매캐한 향냄새가 온 집안을 떠돌고 아빠가 먹을 갈아 쓴 지방을 쓰시는 풍경. 하나 둘 제기를 가져와 제사상을 차리고 현관문을 반쯤 열어둔 채 고개를 조아리면서 빨리끝나고 저거 다 먹을 생각에 군침이 고이던아득한 기다림의 시간.
제사가 끝나면 나물 한꺼번에 넣고 간장 넣어 비벼먹는 비빔밥도 좋아했고 동그랑땡. 고구마전,문어, 토란 들어간 탕국다 좋아했지만 그중에서제일 좋아했던 것은 겹겹이 쌓아 올린 배추전 꼭대기에 윤기 나는 갈색 자태를 뽐내던 계적이었다.
울엄마의 피땀눈물을 갈아서 만들었던 상
배추전 계적 산적 삼층탑이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것
닭고기를 삶은 후 종일 양념을 끼얹고 졸여서 만든 것. 요즘 맛으로 치면 찜닭과 간장치킨의 그 어디쯤. 담백하고 야들야들한 식감. 식어도 맛난 그것. 제사가 끝나면 엄마가 어른들 몰래 내 입에 제일 먼저 넣어주었던 것.
이제는 울 엄마 당신이 정말 먹고 싶은 날에 가끔 만들어서 나와 아이들에게 나누어 먹이곤 하신다. 얼마 전에 추석이 가까워지니 생각이 난다며 닭 한 마리를 사다 달라더니 온 집안에 온통 간장 냄새가 가득하다.
참 보면 볼수록 손 많이 가는 음식.
이제 이거 내가 배워서 해 먹을 테니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그런다.
"이런 거 배울 필요 없어. 배우지 마.
그냥 엄마 살아있을 때 얻어먹고 말아."
엄마와 마주 앉아 고기를 살살 찢어 먹다가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그러고보면 우리 엄마는 그동안 제사상을 수없이 차리고 치우면서도 딸이었던 나에게 어서와서 거들라고 채근한 적이 없다.
아마 그 시절의 엄마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책이 아니었을까...
어느새 나의 아이들이 달려와입을 벌린다.
한번도 제사상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차릴 일이 없을요즘 말로 진짜 조상복 받은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