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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Sep 27. 2020

제사는 종료되었습니다만

우리 엄마는 30년 넘게 제사를 지내오셨다. 아니 30년 넘게 혼자 제사상을 차렸다는 말이 더 맞겠다. 둘째 며느리였지만 맏며느리의 부재 남편의 남다른 형제애, 양반 집안이라 무논리 전통 덕에 제사를 모실 수밖에 없었.  어릴 적에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한동안 우리 집 안방 한쪽에 작은 상을 차려놓고 매일 삼시세끼 때에 맞춰 밥과 국을 올리고 절올리던 기억이 있을 정도 유교문화가 철두철미한 집안이었다. 그렇게 삼십 년 넘게 엄마는 시 증조부모와 시부모, 큰 형님의 기일과 명절 때마다 을 차리기 위해 생을 하셨다.


우리 집엘리베이터 없는 19평 주공아파트 5층에  살았는데 계단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며 장을 봐오고 음식을 만들어 스무 명쯤은 가볍게 넘겨 모이는 친척들에게 대접을 하는 그 고된 일을 엄마 혼자 어찌했나 싶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졸이고 부치고 삶고 끓이고 하다못해 모양도 크기도 보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어쩜 그리 손 많이 가는 것들인지. 심성 고운 고모들이 일찌감치 오셔서 거들어 주시긴 했으나 어린 내가 봐도 울 엄마의 엄마 아빠도 아닌데 왜 저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다. 게다가 엄마를 비롯한 고모들, 그러니 집안의 여자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였는데 남자들 때문에 이 가혹한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이기도 했고, 그렇게 때마다 왁자지껄 모이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제사 노동에 대해서 항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돌 때쯤 되었을 때 엄마 감기가 통 낫질 않고 온몸이 아프다 하시더니 응급실 가급성신부전증이라는 판정을 받다. 투석 환자가 되 것이다. 때마침 할머니 제사가 돌아왔을 때였는데 매일 하루 세 차례 투석을 해야 하는 며느리가 제사를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엄마의 30년 간의 제사상 차리기 임무 되었다.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아버지를 비롯한 그 누구도 제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다들 그동안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 누구에게도 제사를 지속할 명분이나 기꺼이 수고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건 확실하다.

그렇게 하늘이 무너져도 지내야만 했던 제사가 며느리의 병환하루 아침에 게 끝나버렸다.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 분명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 실은 여자 한 명의 노동력에만 온전히 의지 것이라니. 너무나 연약하고 불평등한 세계의 실체가 그제서야 확실하게 드러났다.


엄마는 렇게 제사를 투석과 맞바꾸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삼 년 후 아들에게 신장 이식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잘 이겨냈기에 이제는 추억으로 쓰지만 우리 가족에게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그놈의 제사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원망하다가 또 그래도 제사를 잘 지냈기에 복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셔서 날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곤 한다. 동생과 나는 모두 기독교이고 배우자 그 가족들 또한 기독교이기에 이제 우리 집안에서 제사는 흘러간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아빠의 1주기 때도 가족끼리 추도예배를 드린 후에 미리 준비한 추모영상을 함께 보고 아빠가 좋아하시던 해물칼국수를 시켜먹었데 엄마는,


"아이고 그동안 수없이 제사상 차렸는데 정작 너네 아빠는 제삿밥도 못 얻어먹고 훌쩍, (일동 긴장) 이렇게 좋아하던거 시켜먹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아~"라고 하셔서 모두들 었다.

더할 나위 없는 추모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몸의 기억이란 것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해서 엄마의 노동으로 얻어먹은 제삿밥 생각나곤 한다.


매캐한 향냄새가 온 집안을 떠돌고 아빠가 먹을 갈아 쓴 지방을 쓰시는 풍경. 하나 둘 제기를 져와 제사상을 차리 현관문을 반쯤 열어둔 채 고개를 조아리 빨리 끝나고 저거 다 먹을 생각에 군침이 고이던 득한 기다림의 시간. 


제사가 끝나면 나물 한꺼번에 넣고 간장 어 비벼먹는 비빔밥도 좋아했고 동그랑땡. 고구마전, 어, 토란 들어간 탕국 다 좋아했지만 그중에서 제일 좋아했던 것은 겹겹이 쌓아 올린 배추전 꼭대기에 윤기 나는 갈색 자태를 뽐내던 계적었다.


울엄마의 피땀눈물을 갈아서 만들었던 상
배추전 계적 산적 삼층탑이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것


닭고기를 삶은 후 종양념을 끼얹고 졸여서 만든 것. 요즘 맛으로 치면 찜닭과 간장치킨의 그 어디쯤. 담백하고 야들야들한 식감. 식어도 맛난 그것. 제사가 끝나면 엄마가 어른들 몰래 내 입에 제일 먼저 넣어주었던 것.


이제는 울 엄마 당신이 정말 먹고 싶은 날 가끔 만들어서 나와 아이들에게 나누어 먹이곤 하신다. 얼마 전에 추석이 가까워지니 생각이 난다며 닭 한 마리를 사다 달라더니 온 집안에 온통 간장 냄새가 가득하다. 

참 보면 볼수록 손 많이 가는 음식.

이제 이거 내가 배워서 해 먹을 테니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그런다.


"이런 거 배울 필요 없어. 배우지 마.

엄마 살아있을 때 얻어먹고 말아."


엄마와 마주 앉아 고기를 살살 찢어 먹다가 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우리 엄마는 그동안 제사상을 수없이 차리고 치우면서도 딸이었던 나에게 어서 와서 거들라고 채근한 적이 없다.

아마 그 시절의 엄마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책이 아니었을까...


어느새 나의 아이들이 달려와 입을 벌린다. 

한번도 제사상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차릴 일이 없 요즘 말로 진짜 조상복 받은 아이들. 

이번 추석에는 이렇게 고된 사연이 깃든 음식도 있다는 걸 찬찬히 들려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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