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정엄마와 함께 산다. 이렇게 말하면 어머, 좋겠네. 엄마가 다해주겠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며느리랑은 살아도 딸이랑은 못 산다던데 괜찮아? 라던가 남편이 힘들겠다, 라는 사람도 있다. 뭐 어느 정도는 맞고 또 어느 정도는 틀리다.
엄마와 살게 된 계기는 자연스러웠다. 첫아이를 낳은 후에 친정근처로 이사를 왔고 엄마의 극진한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를 키웠다. 6년 후 갑자기 생긴 둘째를 낳고서도 그랬다. 풀타임 근무는 아니었지만그래도 엄마가 있어서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빠가 퇴직하신 이후로는 두 분이 소일거리로 우리 집을 드나들며 아이를 봐주셨다.그러다가 우리 집이 이사를 해야 할 무렵 이사날짜가 맞지 않아 두어 달 정도 양가를 오가며지낸 적이있었다. 평일에는 친정에서, 주말에는 시댁에서 남는 방 한 칸을 빌려 네 식구가 지내면서 대가족이 살면 이렇구나를 체험했다. 극한 상황에 닥치면 오히려 철없이 낙관적이 되는 나는 양쪽 다 크게 불편한 점이 없어서 나중에 합가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두 달을 그리 보내고 다시 우리가 살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어차피 친정과는 5분 거리였다. 얼마 후남동생은 결혼해서 서울에 살게 되었고,아빠는 예고 없이 투병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2년여간 엄마가 집에서 아빠를 간병했는데 병이 악화될수록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나름 이겨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어느 때가 되면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는 어려울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근처에 살며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했던 우리 부부는 그때부터엄마와 함께 살 집을 찾기시작했던 것 같다. 모든 준비와 결정이 끝나고 이사를 할 무렵, 결국 상태가 악화된 아빠를 병원으로 모셔야 했고 아빠는 8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사실 이 과정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지만 우리 가족은 우리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애쓰며 그 시기를 견뎌냈고합가도 그 방법 중에 하나였다.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같이 살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시에 남편에게 엄마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별 망설임 없이 괜찮다고 해서 조금 놀랐었다. 남편은 장단점은 있겠지만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사를 하던 날,엄마는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서운하실 수도있고 걱정도 되시겠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잘할거라고, 박서방은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인 것을 아주 잘 알고 늘 고맙게생각한다'고 하셨다.시어머니는'걱정하지 않는다고,부디건강하시길 바라고잘 부탁드린다'라고하셨다.그것또한 고마웠다.그렇게 친정엄마와 함께 살기를 시작했다.
나는 엄마와 친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지냈던 딸이다. 너무 가까워서 사춘기 때는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은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고 싫어하기도 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림이란 것을 해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실감했다.성실하지만 늘 실패하는 아빠와 살면서 엄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유 넘치는 삶을 만들어냈다. 돈이 많아도 여유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어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 엄마는 후자였다.
밝고 명랑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
누추한 부엌 창가에당근일지언정컵에 꽂아 꽃을 피워내 기뻐하는 사람.
누구든 초대해서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길 즐기고,저렴한 옷 열 벌보다 질 좋고 예쁜 옷 한 벌을 사길 좋아하는 사람.생활력도 강했다.맞벌이 친척들의 아기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며 돈을 벌고 그러면서 살림도 알뜰하게 해내셨다. 그때는 급식도 없이 야자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아기를 돌보며 아침마다 매일 다른 반찬으로 나와 동생의 도시락을 네 개씩 싸주던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엄마는 그렇게모아둔 돈으로 내가 배낭여행을 간다 하면 비행기표를 사주셨고,남동생이 재수를 원하는 걸 눈치채자마자 학원에 등록해주셨다.
종종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가 아니라'엄마처럼 살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나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혼자 먹을 때는 밥 한 끼 차려먹는 것도 너무 귀찮아서 김치 꺼내는 것도 생략하고 밥에 달랑 김 한 장 싸 먹는 인간인데. 그러면서 헬렌 니어링을 들먹이며 더 소박하고 간단하게, 있는 재료 그대로 먹는 것이 좋다고. 요리할 시간에 쏟을 에너지를 다른 데에 쓰자는 말을갖다 붙이며 스스로 궁색해지는 인간이 난데. 울 엄마는 혼자 먹는 아침 밥상도 그리 예쁘게 공을 들이는 분이다. 합가 초기에는 그것이 문제였다. 엄마는 온 식구에게 매끼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엄마는 종일토록 오직 주방에서 먹고 치우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려고같이 사는 거 아닌데.엄마가 남은 일생을 좀 더 즐겁게 편안하게 재미있게 살면 좋겠는데. 나는 엄마가 종일 가정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싸웠다. 엄마는 밥상 차리는 것이 뭐가 힘드냐며,너는 어쩜 10년 동안 그러고 살았냐고 했다.
그러나끼니 때마다 정성스럽게 5인분의 밥상을 차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치우는 것 또한 대단히 수고스러운 일이다.설령 그것을 좋아한다 해도 이 집에서 가장 노쇠한 여성이 도맡아 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충안을 만들었다.
귀가시간도, 식사시간도모두 다르기 때문에 온 가족이 모여 먹는 것은 주말 저녁으로만 하자. 아침에 아이들 챙기는 것은 내가 할 것이고, 점심은 어차피 집에 엄마 혼자 계시니 알아서 드시고저녁을 5시 전에 드시는 엄마가 7시에 먹는 우리 밥상까지 챙길 필요는 없다.
그 후로 엄마는 낮동안은만들고 싶은 것을만들어 드시고저녁 5시가 되면 과감하게 주방과 작별한다.나와 남편, 때로는 큰아이까지 동참해서 어떻게든말도 안 되는 것을 해 먹고 설거지까지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모습이 엄마가 보시기에는 기가 차겠지만 참견하지 않고 운동을 하러나가시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신다.
주말에 장을 보러 갈 때면엄마가 원하는 식재료를 메모해주면 그것을 사다 드리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냉장고를 채운다. 가끔은 서로의 밥상에 동참한다. 엄마는 냉동 곤드레밥과 밀키트 감바스의 맛을 알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배추전과 감자전을 먹게 되었다. 와중에 엄마가 우리에게 꼭 제 손으로 해먹이고 싶어 하는 것들 -감자탕, 백숙, 제사음식인 계적이나 동그랑땡, 손만두 등등 -은 다 함께감사히 먹는다. 외식이나 배달음식도 질색하시던 엄마가 이제는 연금 받는 날에 기념이라며 통닭을 쏘신다.
그렇게 주방은공유 주방처럼 사용하면서청소나 세탁 같은 일도 '각자의 것은 알아서, 함께 쓰는 것들은 나누어서' 해결한다. 이전에도 우리 부부는 집안일을 분담해서 해왔기 때문에 - 쪼끔 더 솔직해지자면 남편이 가리지 않고 집안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은 독박이 없고 독박이 없으니 갈등도 크지않다. 다 함께 살려면 그리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사랑이 많고 다정한 엄마와 살면서 아이들도 매일 그 사랑을 받는 것은 덤으로 오는 복이다. 사춘기라 늘 날이 서있는 큰아이는 외할머니 앞에선 언제나 순한 양이다. 나에게는 절대로 보내지 않을 사랑한다는 말, 깜찍이 이모티콘도 할머니에게는 후하다. 둘째 녀석은 아직도 매일 자기전에 할머니방에 들어가 꼭 끌어안고 인사를 하고 온다. 남편은 나에게 말로 다 못할 불편함도있을 테고,장모님과 격의 없이 지내는 타입도 아니지만 워낙 가정을 사랑하는따순 사람인지라그렇게 지내주는것이고맙다. 엄마는 종종 이번 달 휴가라며 일주일씩 이모네 집으로 지내러가고 친구들이랑 여행도다니신다. 이쯤 되니 친구 중에 과부가 많아져서 더 잘 통한단다.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이 제일 걱정 없이 좋다고. 때때로 참 힘든 인생이었는데 너희와 있는지금이 제일 평온하다고. 작년에는 내게 이런 카톡도 보냈다.
참 다정한 우리 엄마.
다행이네, 엄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면서엄마 앞에서는무뚝뚝한 코리아 장녀인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나야말로 함께 살아주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