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두 개 화장실 하나 부엌 하나와 작은 거실이 딸린 집이었는데 그 집에 얼마간 함께 살았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서로 형편이 어려워 우리 집에서 방 하나를 세를 준 것이다.아주머니에게는 스무 살쯤 된 아들이 있었고 종종 며칠씩 자고 가곤 했다. 이름이 김관기였나, 김광기였나. 아직도 정확히모르겠다.어렸던 나는 우스개처럼 감기오빠라 부르곤 했다.감기오빠는 S대 법대에 가서 변호사가 될 거라고 재수를 한다고 했다. 아마 공부를 꽤 잘했던 효자아들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앞집 옆집 정도면 서로의 사정과 형편을 거짓 없이 알고 기꺼이 간섭하고 보살펴 주고 그랬어서 우리 집과는 꽤나 각별하게 지냈었다.
하루는 엄마가 시장을 보러 갔는데 그날따라 너무 늦게 오시는 거였다. 창문으로 아무리 언덕길을 내려다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저녁노을만 애타게 지는데 동생은 벌써 울음이 터졌고 나도 울음이 터지려던 찰나,마침 집에 있던감기오빠가우리를 달래줄 셈으로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한 해 두 해 지나서 어린 왕자 돌아왔다네
그렇지만 그 꽃은 이미 지고 말았다네
이런 노래였다.
(원곡:꽃과 어린 왕자)
공주에 푹 빠져있던 나이어서인지 왕자도 나오고 장미꽃도 나오는 그 노래가, 꼭 동요 같기도 하고 가요 같기도 하여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들려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이 노래는 원래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 하며 '어린 왕자'라는 책을 보여주었다.손바닥만 한 문고판에 세로 쓰기로 인쇄된 깨알 같은 활자의 책이었고 삽화도 흑백버전으로 기억한다. (현재 검색해보니 범우소설문고.1978년 출판인 것 같음) 야심 차게 책장을 넘겨보았으나 기대했던 왕자나 공주는 보이지 않고 뜬금없이 모자와 뱀 그림이 등장해서 실망을 했고 그래도 간간히 등장하는 삽화들이 난생처음 보는이국적이고 섬세한모양이라 마음을 홀딱 뺏겨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후우리 집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고 감기오빠네랑도 작별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로 이사한 집으로 오빠가인사를 하러 왔다. 군대를 간다고 했던가, 대학에 합격했다고 했던가, 어디 멀리 다른 도시로 간다고 했던가. 아무튼 우리 엄마는 무척이나 서운해하며 작별인사를 했고 나는 영문을 몰라그저오빠 얼굴을 구경했다. 오빠는 나를 데리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를 맘껏 고르게 하고는 선물이라며 '어린 왕자' 책을 주었다. 지금은 읽기가 어렵겠지만 좀 더 커서 천천히 읽어보라 했다. 나는 너무나 좋아하면서 돌아가는 오빠에게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그 후로 오빠네와는 소식이 끊겼고 감기오빠가 무사히 제대를 해서 정말 s대 법대에 가서 집안을 일으킨 청년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 작고 예뻤던 책은 몇 번이나 읽어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어디로 가버린지도 모르게 되었다.
'어린 왕자'를비로소 끝까지 다 읽고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게 것은 그 시절의감기오빠만큼이나 커버린 후였다. 그렇게 어른이 된 후에는 양장본의 '어린왕자'를 구입해서 표지를 베껴 유화를 그리기도하고, 이런저런 굿즈를 사모으기도 하고, 프랑스로 여행을 갔을 때는 화폐에 그려진 '어린 왕자'를 보며 호들갑을 떨며간직하기도 했다. 사실 쉽다고도 쉽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작품이 딱히 읽지 않은 이들에게도팬시상품으로 기꺼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 역시 어른을 위한 동화가 맞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헌데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불리며 시공간을 초월하며 사랑받고 소비되는 책들의 주인공들은 왜 그리도 외롭고 조숙한 아이들인지.어린 왕자, 모모, 삐삐... 다들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어린 왕자'를 읽다 보면 하루에 마흔네 번이나 노을을 바라보는 마음, 수천 송이의 장미꽃을 보며 엎드려 우는 마음, 그리고 급기야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 마음까지, 왕자님 심성이 너무 곱고 여리고 우울해서 안쓰럽다. 마지막장 독자에게 고하는 편지에 이르면 사막이든 우주든 뒤져서라도 어린 왕자를 찾아내고 싶어지는 것은 나뿐인가요...
재작년에는'애린 왕자'도 구입했다.독일에서 어린 왕자 전 세계언어 번역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희귀 언어나 방언, 모스부호 버전까지 120개 넘는 언어로 출판되었는데 그중 우리말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한 것이 '애린 왕자'다. 경상도사투리로 읽는 어린 왕자는 할머니 무르팍에 누워 듣는 것 마냥 구수하고 애틋하다. 표지와 마지막 장면만 소개하자면,
이것이 갱상도 버전 애린왕자
퍼뜩 편지를 보내도. 갸가 돌아왔다믄서...
나에게 최초의 어린 왕자를 선물해 주었던 감기오빠, 이제 50대 후반 정도 되셨으려나.이번엔 내가 어린 왕자 사투리버전을 선물해드리고 싶은데. 잘 지내고 계시나요. 홍은동 언덕의 지는 저녁 노을, 우는 아이들을 달래주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