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싶은데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미련이 너무 많다. 맺고 끊는 것을 잘 못하고 그리했다가도 잘 잊어버린다. 아주 미웠던 사람도 세월이 흐른 뒤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손 부여잡고 반갑다고 할 것 같다. 그런 모지리가 누구냐면 바로 나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해서 그도 날 좋아할 수는 없겠지.통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서면 아닌 적이 더 많았고 평생 볼 사이인 것 같지만 시절이 지나면 그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이와 성별을 넘어 2~30년 넘도록 마음이 맞아 인연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그중에 J언니, 그녀와도 벌써 25년쯤 된 인연이다.
J언니는 한번 보면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신입생 때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언니는 다소 큰 체격에 온통 까만 옷을 입었고 고독해 보이는 두 눈과 그렇지 못한 상냥한 태도를 가졌다. 목소리나 말투가 군더더기 없이 선명해서 사회생활을 해본 테가 났는데 그 와중에도 숨길 수 없는 독특하고 묘한 감수성을 가진 것이 보였다. 과 특성상 본인이 특이하다고 믿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라 해야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그랬다. 언니가 도서관 앞에 서서흩어지는 머리칼을 담배연기로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우하하 웃음을 터트리면 지나가던학우들이 한 번씩 돌아보곤 했다. 술자리에서 투명한 소주잔을 셀 수 없이 가뿐하게 비우고,맨발로 "어둠 속에 빛처러엄~ 마이러업~"을열창하노라면 일동 기립, 박수를칠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쓰는 글은 남들과는 다른 삶의 흔적이 느껴졌고 꽤나 어두웠지만, 동기들과 어울릴 때에는 누구보다 천진난만했고 그와는 별개로 매우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짜이, 술이나 한 잔 하자.
좋죠!
내심 단짝처럼 친해지고 싶었지만 언니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회가 없었던 나는 냉큼 만날 약속을 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시절의 지도교수님을 몹시 존경했고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노는 것만큼이나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고 교수님 역시 우리를 각별히 아껴주셨다는 것이다.그것이 발단이 되어 따로 만난 그날부터 급격히 친해졌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아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얼마 후 나의 고등학교 때의 절친들 모두가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그때의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노는 것을 너무 좋아했는데 그 결과 나의 절친 중 두 명이 나의 후배 혹은 후배 친구와 결혼을 했다. 그런 역사적인 만남의 자리마다 언니도 함께 있었다.
학교 앞 작은 방에서 자취를 하던 언니의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가던 시절. 참 많은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늘 무심히 돌아보며 "왔냐, 뭐 먹고 싶은데?"묻고는 생라면을 볶아서 라면땅을 짜잔 만들어주던 언니. 책, 영화, 그리고 담배연기로 가득한 그 방에는 나 말고도 늘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언니는 한 번도 그들을 내쫓거나 타박한 적이 없었다. 학기 중에는 물론이고 방학 때도 둘이 또는 여럿이몰려다니며술 마시는 것 말고도 많은 걸 했다. 공연을 보러 가거나 여행을 간다던가. 땅끝마을의 어느 유서 깊은 여관 마루에 걸터앉아 때마침 내리던 빗소리를 들으며 지새우던 날이있었고 인터뷰 과제를 한답시고 대천 앞바다에서 좋아하던 작가를 만나 소탈한 밥상을 나눈 날도 있었다. 그밖에도 대학시절의 낭만 같은 것들은 언니랑 다했다. 아예 함께 살던 때도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웃기고 짠해서 생략. 배낭여행 다닌답시고 나란히 휴학을 했을 때도 교수님 생신이 되면 선물을 들고 학교를 찾았고 훗날 교수님이 그 이야기를 책에 쓰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에게 서로가 첫눈에 반한 애인이 생겼고불같이 사랑을 하더니만 번개처럼 빠르게 우리 과 최초의 cc로 결혼을 했다. 형부되는 분은 후배님이자 시인님이었고 언니만큼이나 삶의 궤적을 촘촘하게 메꾸어 온 분이었다. 그들의 결혼식은 거의 우리 과의 축제였고 내 친구들 전원이 참석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나는 심지어 신혼여행이튿날에 제주도까지 날아가서 숙식을 제공받고 여정을 함께하며 사진 찍고 난리 부르스를 추었다. 그런데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지. 그 좋았던 여행의 마지막날 우리가 몹시도 사랑하고 존경했던 교수님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언니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돌아왔다.
졸업을 하고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십여 년 동안은 언니와 만나지를 못하고 살았다. 언니는 종종 뜬금없는 전화를 걸어오곤 했는데 주로 오밤중에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였다. 야, 뭐 하냐, 나와! 물론 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는 암울한 육아기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그러다가어느 날엔 홀연히 나타나 점심을 사주고 돌아갔다. 전처럼 가깝게 지내지 못해서 못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은 있었지만 언제든 다시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란 것에 족했다. 몇 년 전부터 어떠한 일이 계기가 되어 계절마다 한 번씩은 만난다. 연락을 할 때면 나는 늘 거의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뭐 해? 난 집인데) 그녀는 늘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난 충무로, 미국, 베트남, 제주도, 평창, 남해 야, 요즘은 사진전공 석박사, 디자인과 교수, 락스타 팬클럽, 드론 3D 촬영기사, 부동산 공부 하고 있어) 스펙터클한 삶을 말도 안되게 성실하게 살아내는 언니의 안부는 늘 궁금하다.형부로 말할 것 같으면 여전히 매일 출근을 하고 시를 쓴다. 마치 영화패터슨처럼.
며칠 전 언니의 세컨드하우스에 다녀왔다. 은퇴 후에 살 생각으로 미리 남해에 집을 마련한 것이다.
온 가족이 5시간 넘게 차를 달려 남해, 그 영롱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도착했다. 그 집의 이름은 시를 쓰는 형부의 필명을 따서 지었다고 해서 그 이름과 많은 마음을 담아 현판을 만들어 선물로 들고 갔다. 언니와 형부는 지중해의 별장에 초대한 호스트처럼 멋진 식탁을 차려두고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TV와 시계가 없고, 모든 방마다 반짝이는 바다가 펼쳐지고, 바람마저 고요한 앞뜰에는 손수 심은 나무들이 자라나며, 동네 고양이들이 밥때마다 찾아오는데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기다리는 집.그들이 왜 그 집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노을이었는데말이나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가 없다. 형부는 내내 인생도 저리 아름답게 져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어린 왕자가 노을을 보았던 날에 대해 말했다. 어린 왕자의 별에서는 의자만 고쳐 앉으면 노을을 볼 수 있어서 어느 날엔 마흔네 번이나 노을을 보았다던, 누구든 슬프면 노을을 보고 싶은 거라고 하던 그 장면말이다. 비행사가 그날 그렇게도 슬펐던 거냐고 묻자 어린 왕자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이르자 나도,언니도 글썽거렸다. 정말이지, 그 집엔 어린 왕자가 의자 들고 찾아올 것만 같은 노을이 진다. 우리는 울다가 웃고 떠들다가 노래하다가 그렇게 밤을 보냈다. 언니는 노래를 마치고 딱 맞는 자리를 찾았다며 선물한 현판을 벽에 걸었고 그것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려서 기뻤다. 형부가 그 집을 글 쓰고싶을 때 와서 지내는 곳으로 만들어 둘 테니 언제든 오라고 했건만, 글이라고는 브런치밖에 안 쓰는 사람도 되는 건가요...
좋아하는 옛날 노래 중에 김현철의 형, 이라는 서글픈 사연을 가진 노래가 있는데 언젠가부터 그 노래를 들으면 언니가 자동재생된다. 그 노래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형, 내가 아직 어리고 나의 길을 볼 수 없어도 가끔씩 날 다독거려 주는 형 그 손길에 난 만족해
언니, 비록 나는 이제 어리지 않고 나의 길은 더 이상 비약적인 발전 같은 것 없이 이대로 저물겠지만 가끔씩 언니가 날 다독거려 준다면 그걸로 만족해.
내일의 언니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질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언니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좋아, 그저 여기에 이렇게 수줍은 고백을 하며 언니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