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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Sep 14. 2020

바보 같은 짓, 세 가지

인생을 살아오며 바보 같은 짓을 정말 많이 했지만
그중 대표적인 세 가지를 뽑아보라면

첫 번째, 대학교 3학년 때 작업실을 얻는답시고 울 엄마의 쌈짓돈으로 같은 과 언니, 오빠랑 같이 학교 아래에 방 세 개짜리 전세를 얻 자취를 시작한 것.

전세금 기여 순서대로 방이 배정되었고 나는 직삼각형 모양의 가장 작은 방을 가질 수 있었다. 당장에라도 뭔가를 이뤄낼 것 같은 원대한 포부를 가진 룸메이트들이었지만 모두의 예상대로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은 모든 학우들이 술병을 들고 모이는 과방이자 술집, 엠티 장소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집안이 난장판이었다. 두 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있었고 한 명은 마루에 수박을 박살내고 있었 또 다른 한 명은 울고 있고. 그날은 과해도 너무 과했는지 주민들의 민원으로 경찰과 집주인까지 등장했다. 집주인은 바닥 가득한 소주병들을 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이래서 학생들한테 세를 주는 게 아니었는데...

 년이 지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우리는 결국 집을 빼기로 결정했다. 다시 서로의 돈을 나누어 가진 후,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하고, 당시 유행하던 스티커 사진을 찍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집으로, 언니와 오빠는 학교 근방 내 최대한 서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방을 다시 얻었다.

두 번째, 졸업반이 되었지만 뭐하나 내세울 스펙도 없었고 취업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박약했다. 그래도 전공을 살리고는 싶어서  한 번 엄마의 쌈짓돈을 빌려 방송아카데미 구성작가반에 등록해버렸다.

아카데미를 수료할 때쯤 운 좋게도 모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 자료조사원 자리를 얻게 되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공영방송에서 일을 시작하는 건 방송작가 지망생에게 굉장한 행운이어서 모두들 부러워했지만 사실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었다. 막내작가라 러주었고 졸업 후 첫 직장이긴 했지만 이건 뭐 직장이라 하기도 애매하고 작가라고 하기엔 더욱 애매한 초특급 버라이어티 비극이 매일마다 펼쳐졌다.

그곳의 첫날, 컴퓨터에 인터넷선도 채 연결되지 않았는데 우리 팀 피디 준 첫 번째 업무는 제5공화국의 실세였던 ㅈ의 연락처를 알아오라는 거였다. 대관절 소설만 읽다가 온 어리바리가  연락처를 어디서 알아온단 말이냐. 지금처럼 구글 검색으로 어지간한 건 알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어볼 사람도 없 눈치만 보며 종일 진땀을 흘리며 동동거리다가 철 지난 신문들을 뒤져서 겨우  관련된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 사무실의 번호를 알아냈고 큰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0 방송국의 시사다큐팀입니다. 혹시 변호하셨던 ㅈ씨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은 변호사 사무실의 누군가가 어이없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아니 아가씨, 지난주에 방송 찍어갔던 그 피디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뇨! "
지난주에 방송 찍어갔다는 그 피디는 바로 아래층에서 일하는 피디였고 알고 보니 담당 피디랑 친한 사이였다. 담당 피디에게 가서 조심스럽게 "저... 000 피디님이 지난주에 방송 찍어서 연락처 알고 있다하시는데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피디는 씩 웃으면서 "아하 맞다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마빡에 태극기를 꽂고 와야 되는데. 서둘러!"라고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제야 구성안 초안을 던져주고 섭외해야 할 이름 몇십 개를 읊어주었다. 정말이지 진땀 나게 얄미웠.

당시 막내작가들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메인작가 더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작가님이 원고를 쓰는 동안에는 절대로 집에 가면 안 됐고 화장실에 갈 때도 눈치를 봐야 했다. 왜냐하면 수시로 전화를 걸어 원고 팩트에 대해 질문을 하면 1분 내로 대답을 해야 하고, 그 사이사이에 편집실로 끼니와 커피를 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삼일째 집에 못 가서 떡진 머리로 미역국밥을 편집실에 대령하는데 가님이  동네 방송국 놈들 다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십 년 동안 작가 일하면서 너처럼 일 못하는 애 첨 본다. 나가!"

어지간하면 참아질 말이었고 나만 들었던 말도 아니었는데 그 날은 참아지질 않았다. 그래, 내가 여기서 온갖 고초를 이기고 성공해봤자 저렇게 된다는 건데 안 하고 만다...
그렇게 방송국과 작별을 했다. 쉽고 빠른 포기였지만 사실 배운 것도 많았다. 저히 능력자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를 처음으로 경험해봤. 시청률 바닥을 찍는 시사다큐 한 편을 위해 지금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아와서 무시라고는 당해보지 않았을 고급인력들이 죽을힘을 다해 논리와 철학과 재능과 영혼까지 갈아 넣는 걸 보며 존경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무수한 섭외 전화와 프리뷰 노트 만들기,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르겠는 자료조사를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꾸역꾸역 하는 거였지만 어쩌다  촬영 구성안 한 장이라도 쓸 기회 생기면 뛸 듯이 기뻤고 홍보문이 수정 없이 통과되기라도 하면 이렇게 버티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러나 좀 더 버텼다고 한 들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그때 6명이었던 막내들 중 끝까지 살아남아 송국 간판 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이름을 날리친구는 단 한 명,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성실하고 명석하며 책임감 강했던 친구였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정신을 차고 먹고살만한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세 번째, 제는 인간다운 돈벌이를 해야겠다고 결심고는 부기관의 영상물을 만드는 회사의 계약직 작가로 취직을 했다. 들어가서 보니 팀원들이 어딘지 모르게 나 같은 루저 티를 풀풀 풀기는 우울한 종자들이었다. 나처럼 바보 같은 짓을 몇 번 되풀이하다가 등 떠밀려 취직을 하게 된 사람들. 는 일은 주로 농업술을 관련 부처 전문가들과 협의해서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었다.


처음엔 너무 좋았다. 일단 집도 가까웠내 이름의 출입 목걸이 카도 받았다. (방송국에서는 매일 방문자 출입증을 끊어야 했음) 칼퇴근에 일주일에 두 번은 다른 곳으로 파견근무를 나가는데 그곳의 사무실 환경 정말이지 좋았다. 책상 앞 커다랗게 난 창밖으로는 우거진 나무와 풀숲이 펼쳐졌고 햇살 좋은 날이면 관내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걸 구경할 수 있는 곳. 현직에서 은퇴하신 점잖으신 박사님들과 농작물 재배법이라던가 귀촌인들의 삶, 물관 영상자료 원고 쓰고 가끔 시골 작은 마을의 연구소 같은 곳으로 출장도 가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1년이었다. 그러나 계약을 연장하진 못했다. 판에 박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지겨워졌고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 돼버리는 구조도 짜증이 났 팀원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고. 유는 많았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쓰셨던 박사님만이 서운해하셨지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끝내버다. 그러고는 다시는 매일 출근하는 직장을 가지지 않기로 결심했.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참으로 더할 나위 없었던 그때 그 시절. 돌이켜보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나 확신 없이 막연하게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던 것 같다. 좀 더 신랄하게 내 자신을 꾸짖어주고 싶지만 그래봤자 과거가 변할 것도 아니고 이제 안그러면 되지, 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 더 이상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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