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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Sep 08. 2020

엄마와 엄마 사이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이 있다. 딸들이 한번쯤은 해본 다는 말. 그런데 나는 우리 엄마처럼 살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해서 속상하다. 정확히는 나의 부모 같은 부모가 되어주지 못해서.


기억 속의 부모님은


조용히 좀 해라, 넌 왜 그 모양이니, 공부 좀 해라, 엄마도 돈 없어, 방 좀 치워라, 할 일 다 하고 얘기해, 나도 힘들어 죽겠다,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넉넉함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었으나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고통스러운 내색 없이 하게 해 주셔서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우리 집이 잘 사는 줄로 알았다. 게다가 두 분 다 굉장히 다정하고 너그러웠고 잔소리가 없신 분들이었다. 딸과 아들차별하지도 않았고 늘 내 의견과 취향을 존중해주셨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개봉했는데 '인어공주'를 해적판 비디오로만 구경했기에 이번엔 꼭 극장에 가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 동네에는 극장이 없었, 좌절하는 나를 데리고 엄마는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잠실 롯데 극장으로 서 영화를 함께 봐주었다. 영화를 보며 내 귀에 대고 "네 말대로 만화가 아니고 진짜 영화 같네. 여기까지 와서 볼 만하다, 안 볼 수가 없네." 그러셨다.  


우리 아빠도 그랬다. 국영-이승철-김원준을 좋아하던 나를 위해 온 동네 문방구를 들러 코팅된 브로마이드를 구해서 내 방 벽에 붙여주셨다. 느 날엔 아빠가 컴퓨터에 피씨통신을 연결하고 하이텔 아이디 접속방법을 알려줬는데 내가 그만 밤마다 서울 사는 남자애랑 채팅하 재미에 홀딱 빠져가지고선 전화비가 10만 원 넘게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가 중3 때였다. 크게 혼날 법도 한데 울 아빠 아무 말 없이 월정액제로 바꿔주 이제 마음껏 밤 새 해도 된다고 하셨다.

두 분 다 학창 시절 내내 성적표를 먼저 보여달라고 한 적도 없으시다. 시험 못 봐서 보여주기 싫다고, 다음에 보여준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셨다. 잘했으면 좋아하시고, 못했어도 큰 걱정이나 꾸지람이 없으셨다.  


지식인도 전문직도 아니고, 부자는 더더욱 아니었던 나의 부모님.

아버지는 평생 공장, 농장, 택시기사와 같은 노동을 하셨는데 하는 것마다 사건 사고가 터져서 망하는 운이 나쁜 남자였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친척들의 어린 아집으로 데려와 돌보아주며 고단하게 사셔야 했다. 그렇지만 두 분 다 자식에게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고 돈과 현실에 매몰되지 않은 채, 와 동생을 키워내셨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엄마랑 장 보러 가는 걸 좋아했다. 대부분은 집 앞의 시장으로 갔지만 가끔은 버스를 타고 동네 아파트 수입 상가 가곤 했다. 곳에서 시장에는 없는 것들을 구경하고 화려한 여사장님이랑 이야기도 나누다가 수입치즈나 버터, 과자를 조금 사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월급날이었거나 엄마가 특별히 우울했던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엄마에게는 그런 소비가 숨통을 트이게 해 줬을 것이다. 한 번은 그곳에 아주 우아하고 예쁜 원피스가 걸려있는 걸 보았는데 한 참을 망설이던 엄마 결국 꽤 비싼 값을 주고 그 원피스를 사셨다. 사장님은 이 옷은 두고두고 입다가 나중에 딸에게도 물려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에게는 그걸 입고 갈만한 곳이 없을 것 같 그런 원피스. 그리고 덩달아 나에게는 늘 사고 싶어 했던 도자기로 만든 정교하고 아름다운 강아지 인형을 사주셨다. 거야말로 우리 집엔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이었는데. 그렇게 쓸모없고 어여쁜 것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 우리는 아주 즐거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엄마가 나에게 그때 그 원피스를 물려주셨다. 아직도 이걸 버리지 않았냐고 놀라니 무려 25년 동안 옷장 안에서 고이 간직해 왔다고 했다. 딱입을 일 없었고, 키가 작은 엄마에게 그리 어울리지가 않았지만 옷장에 걸어두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내가 입어보니 아직도 말짱하고 잘 맞는다.




거울 속의 나는 그 시절 엄마 나이, 

그런데 나는 왜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걸까.


코로나 19 시대로 종일 아이들과 복닥 여야 하는 삶.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절대 하지 않았던 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나의 통제 아래 있기를 바란다. 아이의 휴대폰을 통제하는 앱을 깔아서 게임 시간을 조정하고 매일 학습량을 체크한다. 그러다가 우리 아빠는 어쩌자고 그 중요한 시기에 피씨통신 월정액제를 끊줬었는지, 생각하면 웃음이 다 난다. 실 월정액제를 쓴 이후에 서울 사는 남자애와의 채팅도 시들해지고 피씨통신에도 흥미를 잃었었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모두들 더 순진했었나?

수십 번도 더 본 것 같은 마블 영화를 검색하고 또 검색하는 아이를 질책하면서 그러다가 고작 '미녀와 야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고생스럽게 함께  준 엄마를 생각해본다. 심지어 미녀와 야수 ost 카세트테이프까지 사줬었는데.

 시절은 지금보다 모두들 더 너그러웠나?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해준 것처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잔소리 없이 사랑하고 욕심 없이 지지해주기가 너무 어렵다. 의 자아도 찾아야겠고, 불안한 미래도 대비해야겠고, 유난 떨지 않으면서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도 해야겠고, 그러면서 삶의 소소한 행복도 얻어야겠는데 이상과 현실은 오늘도 제멋대로 뒤섞여 흐르고 열두 살, 여섯 살 두 아이들은 지금도 나를 목청껏 불러댄다.

엄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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