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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Sep 02. 2020

당구야, 나야

그와의 사랑은 뭐가 그리 유난이었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잘 자라는 마지막 통화를 나누고 자리에 누웠는데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였다. 학교 아래 고시원에 살고 있었던 그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마음.


불이라도 난다면? 괴한이 습격한다면? 아니 아니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그를 불러내면 어쩌지? 근거 없는 의심과 불안으로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게도 불과 3분 전에 통화를 마쳤는데 받질 않았다. 그 짧은 사이 잠이 들었을 린 없고 화장실에라도 갔겠지, 샤워라도 하나보다 싶어 5분 후 다시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 편의점에 갔을 거야, 아님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2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건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지나 새벽이 되었고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수십 통을 넘어 수백 통의 전화를 쉬지 않고 걸어댔다. 지금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라는 안내멘트를 친절하게 되풀이하는 여자를 원망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불행한 사건 사고를 상상했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무슨 일이야?" 하며 전화를 받아주기를 기대했더랬다. 마침내 새벽 5시 30분이 되었다. 버스의 첫 차가 시작되는 시각. 서둘러 아무 옷이나 꿰어 입고 몰래 집을 나섰다. 매캐하고 축축한 한여름의 공기가 불안하게 몸을 감싸 왔다. 나에게는 오직 빨리 그에게로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며 가는 동안 심장은 미친 듯이  덜컹거렸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휴대폰으로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댔다. 드디어 고시원에 도착했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가 현관 앞 신발장부터 살펴보았다. 낯익은 그의 운동화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순간 차갑게 몸이 식었다.


그래, 그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이 그저 잠을 자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미쳐버린 내가 이 새벽에 전화 좀 안 받았다고 여기까지 달려왔던 거야......


정신이 번쩍 들어 이젠 누가 보기 전에 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고시원 아래층 당구장의 유리문 너머가 환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이렇게 일찍 문을 열었나, 는 생각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유리문 뒤로 비치는

담배를 꼬나물고 기다란 큐대를 당당히 문지르며 당당히 웃고 있는 의 얼굴이여!

순간 너무도 화가 나서, 억울하고 분해서,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렇잖아도 그놈의 당구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싸웠었다. 담배 피우는 걸로도 그랬다. 피시방 때문에, 술 때문에, 친구 때문에 하여간에 그와는 싸울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늘 이제 안친다고, 끊겠다고, 안 한다고, 안 먹는다고 매번 다정하게 사과하고 약속하며 나를 달랬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당구였는데, 그런데 밤새 당구를 치고 있었다니. 당장이라도 큐대를 뺏어 들고 그를 찔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솟았지만 그래 봤자 내 꼴이 더 우스워질 게 뻔했다. 나는 조용히 지갑 속 소중히 넣어 다니던 그와의 사진을 꺼내 박박 찢고, 네 번째 손가락의 커플링도 빼버렸다. 그리고 다시 신발장으로 가서 영문도 모르는 그의 운동화 속에 던져 었다.

제 우린 끝이야, 정말 끝이야. 

눈물이 운동화 속으로 툭툭, 눈치 없이 떨어져 내렸다.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 가는 길, 아침을 시작하는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돌아봤다. 저들은 알까, 스무 살 여자남자 친구의 당구 치는 현장을 목격하러 밤을 지새우고 첫 차를 타고 달려왔다는 걸. 우습게도 엄마 생각이 났다. 울 엄마는 내가 이러고 다니는 줄 모를 텐데. 엉엉. 이게 뭐야,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한심하게 된 거야. 엉엉. 버스정류장에 서서 비통하게 울어대며 밤새 당구를 치느라 사랑하는 여자의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고 저주했다. 그리고  순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아니 무슨 전화를 500통이나 했어? 나 이제 일어났는데...


방금 일어난 것 마냥 잠긴 목소리였다.

참을 수가 없다.


- 거짓말! 넌 밤새 당구를 쳤잖아!

너무나 뻔뻔하다고. 당구장에 가지 않기로 몇 번이나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이제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사람들이 보건 말건, 거리에 온통 목소리가 울리건 말건 악을 써댔다. 그는 몹시도 당황하더니 거기 어디냐며 당장 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유난히 큰 키에 유난히 검은 머리, 유난히 검은 눈동자. 그는 나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으로 유난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새 운동화를 꺼내 신고 달려 내 앞에 선다. 한 손으론 찢어진 사진 조각들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론 눈물 콧물 범벅된 내 얼굴을 유난히 다정하게 닦아준다. 그렇다고 이렇게 사진을 찢어버릴 필욘 없잖아. 내 손가락에 다시 반지를 끼워준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게, 다시는 당구장에 가지 않을 거야, 담배도 끊고 네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을게. 그렇게 잘못을 빌고 또 빈다. 당구에서 이겨서 딴 오만 원이야, 이걸로 너에게 맛있는 걸 사주려고 했지. 꾸깃한 지폐를 꺼내어 보여준다.


느새 아침해는 완전히 떠올라 온 세상이 환했고 몇 대의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나는 눈물을 그치고 그를 용서했으며 다시 웃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믿어주기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은 당구 쳐서 딴  소중한 오만 원으로 평소에는 갈 수 없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를 사 먹고 스티커 사진도 찍으며 재미나게 놀았다. 다시는 당구장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받아내면서.

스무 살,
어떻게 뜨거워야 할지 몰라서 날마다 함부로 불을 지피고 급하게 물을 끼얹었던 그와의 연애는 그로부터 2년 반 후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그리도 유난했던 사랑의 끝은, 오히려 무난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꼭 약속하고 만난 어른들처럼 연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 너, 아직도 밤새워 당구 치니?

이제는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닌 그가 유난히 다정했던 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응, 나 아직 못 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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