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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Aug 31. 2020

저 문창과 나왔습니다만

1998년, 3월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모든 입시 원서를 문창과로 지원했었 그중에서도 가장 가고 싶었던 교에 난데없이 수석 장학금지 받아 합격했기 때문에 스무 살의 나는 껏 들떠있었다. 당시 우리 집안의 시니컬한 지식인이셨던 고모부는 서울의 명문대도 아니요, 암만 봐도 먹고살기 힘들 것 같은 학과에 간답시고 신나 하는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여기 4년 후에 할 일 없는 사람 하나 늘었네." 라며 농담을 던졌는데 그조차도 마냥 웃어넘길 정도로 각이 없었다. 어차피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청춘과 낭만을 마음껏 낭비하다가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는 예술가로 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IMF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는데도 렇게 철이 없었다.


입학식 , 어정쩡한 정장 차림에 노란 브릿지 염색을 하고 열심히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서 넓은 캠퍼스에 들어섰다. 운동장에 신입생들이 모두 학과별로 모여 입학식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만큼이나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설픈 새내기들을 헤치고 문예창작학과 팻말 뒤로 줄을 서는데 머릿속에선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는 노래가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문창과 신입생들의 절반은 자의식 강하고 책 꽤나 읽다는 아이 들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문창과가 뭔지도 모르고  아이들이었다. (그제야 나 같은 애가 장학금을 받은 게 이해가 갔다.)

그러나 교수진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소설 창작 강의를  맡으신 교수님은 지금까지도 수능 국어에 출제되는 스테디셀러 작품 작가이자 독특한 문장의 스타일리스트로 손꼽히는 한국문학의 거목이셨다. 분께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치시는 교수님 역시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를 만드신 분이었다. 수업 방식이나 분위기 상당히 자유롭다 못해 제멋대로고 그만큼 사제간에 존경심과 친밀감도 두터웠다. 교수님과 맞담배를 피우 풍경이라던가, 5.18이라 수업이 도저히 안된다고 우르르 학사주점으로 몰려가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소설 창작 교수님의 생신이면 시나리오 교수님이 케이크를 들고 강의실을 급습 다 함께 초를 불기도 했고, 명절이인사를 린답시고 교수님 댁으로 두들 려가 먹고 마시고 떠들다 오곤 했다. 쓰다 보니 나 정말 옛날 사람. 또르르...


그러던 어느 날, 소설 창작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신문기사를 복사해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기사 원본을 찾을 수 있다니 인터넷이여...

신혼부부가 엽총으로 잔인하게 살해되고 목격자까지 부상을 입었다는 기사였다. 교수님은 이 기사를 소리 내어 읽으시더니 먼저 희생자의 명복을 빌었고 중간고사 대체 과제이 기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제출 보라고 하셨다. 교수님이 늘 강조하시는 것은 상투적으로 쓰지 말 것. 새롭게 바라볼 것. 과감하게 쓸 것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엽총 살인이라니.

게다가 신혼부부를, 강원도 도로 공사장에서? 영화에서나 봐왔던 킬러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치정일 것이라는 추측도 많았다.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나름의 추리를 하며 기막힌 소설을 써내리라 의욕을 보다. 그날 밤 술자리에선 모두 그 사건 이야기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야심 차게 기를 시작했지만 도무지 상상력으로는 저 낯설고 잔혹한 범죄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무섭기도 했고 희생자가 너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출 마감일이 임박해왔고 제와는 전혀 다른 소설을 써고 말았다. 주인공의 룸메이트 친구남자 친구가 생  외박을 하게 되밤새 전전긍긍하며  못 자고 기다리는 이야기였다. 겨우 마감을 지켜 제출할 수 있었고 교수님의 처분을 기다렸다.


다음 시간이 되자 교수님은 제출했던 작품을 첨삭 지도하여 되돌려 주셨다. 빼곡한 빨간펜의 향연. 맞춤법터 비문, 논리적인 오류, 불필요한 묘사 등등이 세심하게 교정어 있었다. 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절로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봐주실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마지막엔 '우수작, 더욱 정진할 것!'이라고 써주시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게 잘 써서 우수작이라고 한건 아니구우. 수업에 몇 번 들어온 거 같지도 않은데 과제를 낸 게 놀라워서..."


동기들은 내 소설을 읽고 저마다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었다. 합평이란 게 그런 거였다. 내가 얼마나 못쓰는지 처절하게 깨닫고, 다음 더 못쓸 거 같다는 불길한 확신에 사로잡히는 시간.


 후로 나는 문창과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다. 교수님 말씀처럼 정진해 보고 싶었 것이다. 소설 창작 동아리서 말도 안 되는 글을 열심히 쓰고 고치고 합평했으며 공모전에 도전했랬다. (아직도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는 새해 첫날이 되면 가슴 한 구석이 싸르르 저려오는 습관이 이때 들었다.) 결과는 좋지 못다. 내가 가진 재능은 미천했고 천성이 게으르고 끈기 없는 탓에 써보고자 하는 노력도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물불 안 가리던 연애한몫했다. 쓰는 것보다 놀고먹고 연애하는 게 더 좋았고 그러다 보니  기간까지 합해 5년의 대학시절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등단도 취업도 다 망했다. 모부의 예언대로 졸업 후에는 할 게 없었 그럼에도 전공을 살려보고자 발버둥 치며 잠시 글 쓰는 업을 갖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문창과 졸업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그 후로 아주 오랜 후에야 그 시절 신혼부부 엽총 사건의 전말이 밝혀 기사를 발견했다. 전과범이 엽총을 싣고 사냥하러 가던 중에 신혼부부가 자신의 차량을 추월했고,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잔인한 보복운전이었던 셈이. 그 시절 그런 추리를 해서 소설을 써던 동기가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참으로 존경하던 교수님은 내가 졸업하던 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 그리고 우리 학교 문창과는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존폐 위기 처했다가 겨우 존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 문창과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 문과 전공은 우스개 소리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문창과 이야기가 나오면 괜스레 혼자 부끄럽고 반갑다. (일례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보다가 주인공이 문창과 나왔다고 했을 때 입틀막 하고 내적 비명 지) 리고 고이 접어두었던 문창과의 추억을 이렇게나마 조금씩 소환시켜본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다시 한번 다녀보고 싶다는 주책맞은 생각도 해보다가, 그러나 정작 내 아이가 문창과 간다고 하면 정말 말릴 것 같고. (너는 제발 안정적인 직장 다니면서 즐겁게 취미생활하며 살거라)


가지 못한 길, 이룰 수 없었던 꿈에 대한 주제 파악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문창과 청춘들에게 수줍고도 은밀하게 전해주고 싶다.

 

부디 정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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