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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Aug 29. 2020

존엄한 하루에 대하여

2018년 2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69세의 아버지를.

아버지는 퇴직 후부터 조금씩 이상 징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셨고 그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다음엔 말이 어눌해지고 사래가 많이 들렸고 걷기가 힘들어지더니 앉아있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급기야는 용변을 보는 것도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병원을 전전하며 지치도록 많은 검사를 받았다. 다들 병명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에서 모든 게 아니라면 루게릭이 의심된다고 했다. 루게릭이라는 병을 잘 알지도 못했 이름만으로도 공포와 절망이 밀려왔지만 나름 이겨 낼 준비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전동휠체어를 구입하셨고 그것만 잘 의지해도 어디든 갈 수 있을거라며 큰 기대를 하시며 차량에도 쉽게 실을 수 있도록 따로 기계 설치까지 하셨다. 러나 전동휠체어의 작동법을 채 익히기도 전에 감기에 걸려 병원을 찾게 되었고 폐렴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더니 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 올라가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20여 일을 보내며 각종 처치를 한 후에는 손 쓸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전원 하게 되었다. 다시는 집에 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휠체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을 때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드셨고 병원 가방을 직접 챙기셨던 기억이 난다. 방 안에는 평생 업으로 삼았던 공구들이 한쪽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버리지 못하던 망치, 톱, 못 같은 것들. 아마 몸이 나아지면 그 공구를 다시 쓸 생각이셨겠지. 몇 번 타보지도 못한 전동휠체어도 현관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 말을 할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일어설 수도 없게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기관절개술과 위루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관절개술을 하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위루술을 하면 모든 음식을 튜브로만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요즘엔 그런 중대사 한 수술들을 전화로 동의를 받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무미건조하게 동의를 구하는 의사에게 네네 대답을 하고 일단 고비를 넘겼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그 후에 닥친 현실은 처참했다.


 기관절개술을 한 후부터는 산소통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도 이동을 하기가 어렵고 기도를 절개했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할 수 없다. 음식물 섭취를 제대로 하기 위해 위루술을 했지만 트러블이 잦아 결국 콧줄을 이용해 음식물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두 어 시간마다 목에 뚫린 구멍으로 석션기를 넣어 가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고통에 몸서리를 치셨다. 흔히들 말하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상태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손가락으로 조절 버튼을 눌러 침대 높이를 조절하는 것과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보 아주 힘겹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도였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차라리 기관절개술에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날 괴롭혔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이 모든 것이 장차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 거라는 공포가 밀려왔다. 어떤 병이든 환자의 마지막 상태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호흡곤란이 오고 음식물 섭취가 힘들고. 그래서 병원에서는 기관절개술과 위루술을 권유하고 그렇게 생명연장을 하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그것이 옳을 것이다.

존엄사.라는 글자를 보면 두려워진다.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다가 존엄하게 마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본인이 죽음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시점에서부터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견고한 자기주장을 만들어내고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존엄한 마지막을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존엄한 삶을 지속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아파야 오래 산다는 말, 평생 벌어놓은 돈을 마지막에 병원에서 다 쓰고 죽는다는 말들이 실감 났다. 나는 절대 연명 술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다가 아버지에게 죄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떨구게 떨구기도 했다. 이 모든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들이 네 달 사이에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칠순을 맞게 되었다.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친척들을 오게 해라. 떡을 좀 맞춰라. 오시는 손님들은 20분 이상 면회를 하지 않도록 미리 안내하거라. 식사는 넓고 좋은 곳으로 미리 예약하여라. 유난히도 우애가 좋은 아버지의 형제자매들과 칠순을 보내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렇게 하였다. 간혹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정작 아버지는 밥 한 숟가락 드실 수가 없는데!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오전 11시가 되자 병상으로 하나 둘 손님들이 오시고 다들 무슨 말을 할지 모른 채 울먹이거나 아버지 손을 잡아주었다.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그 힘없는 손을.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으시는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호스들 때문에 뒤틀린 그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면회를 마치고는 다 함께 식당으로 가서 잘 차려진 한정식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지만 그냥 웃어버렸다. 맞춰둔 떡까지 손에 들려 손님들을 보내고 다시 아버지 병원으로 가서 말했다.


아빠, 식사도 잘했고 떡도 다 돌렸어.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몇 개의 글씨를 시트 위에 쓰셨다.


잘 했 다 어 서 집 에 가 라


문득 어쩌면 오늘만큼은 아버지에게 존엄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러했기를 간절히 바랬다. 돌아오는 차창밖으로 무수한 빗방울들이 묻어났고 남은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고요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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