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무서운 사람은 나자신
검열 없이 썼던 시절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주르륵 흘려보내면 내 생각도 정리되었다. 와르륵 쏟아낸 것 중에서 버릴 것 버리고 괜찮은 것들을 추려내어 배열하다보면 어느새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다. 내 경험과 생각 밑에 흐르는 반짝 반짝한 사금들을 건져내는 것이 글쓰기에서 얻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경험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내겐 즐거움이었다.
최근 브런치에 글쓰기를 하면서 더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글쓰기 책도 읽고, 글쓰기를 주제로 한 작가의 브런치 글도 읽으면서 다듬어나갔다. 혼자 쓰는 글이 한계가 있다고 느껴져 글쓰기 센터를 가서 교육을 받았다.
어느 때보다 긴장하며 글을 써서 냈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내 생각을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 이만하면 평소 내가 쓴 글보다 나은 것 같았다. 수업에서 들은 팁들을 적용하며 나는 꽤나 문장력이 나아지겠구나 싶어 뿌듯했다.
세번째 시간, 내가 쓴 두번째 글, 합평으로 내 글의 피드백을 받았다. 글 주제는 내가 겪은 어려운 점 극복이다. 나는 내가 힘든 시절을 보냈던 것, 평온하게 사는 친구가 부러웠다는 것, 한편 질투로 미워했던 것, 사주팔자 들은 속상한 이야기를 썼고, 그래도 지금은 내 재능이 될 수 있는 뭔가를 깨닫고 열심히 사는 중이다, 였다.
문장 칭찬은 꿈도 안 꿨는데.. 역시나 ‘이렇게 쓰지 말라.’는 평을 들었다. 글쓰기선생님은 한 마디 덧붙이셨다.
“아멜리씨, 난 선생님 걱정 돼요. 생각을 이렇게 하는 거 아주 위험해요.” 라고.
난 부끄럽고 숨고싶었다. 하지만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웃다보면 행복해진다는 말과 같이, 이 피드백에 미소 지으면 그나마 덜 충격이 올 거 같아서. 그리고 그날은 잘 넘겼다. 그리고 다음 주 과제인 글쓰기를 하랴는데, 생각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내가 쓴 글이, 내가 부정적인 생각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걸까? 그래도 글의 마지막 부분에 희망적인 방향으로 간다는 표현을 했는데, 그래도 내가 생각이 위험한 사람이라고? 나를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편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그 ‘하이드’를 글에 분리해놓은 것인가. 불편한 심정이었다.
검열
다음에 쓸 주제는 인간관계였다. 내가 생각한 대로 자연스러운 생각을 써도 되는 것일까? 안 되겠지? 이렇게 쓰면 나는 또 인간관계를 이상하게 맺는다고 또 걱정하겠지? 글 속의 나는 괜찮은 내가 되야했다. ‘쓸만하게 괜찮은 나’를 풀어내고 있는가? 나를 검열하는 기준이 되었다. 내 생각이 보잘것없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똥철학은 써도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내 글이 위험할 줄은 몰랐다. 생각이 위험하지 않은 글을 써야하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욕심인지도.
나의 글이 나의 위험한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교 4등 정도로 졸업하고, 그 어려움 잘 견뎌낸 어른의 성공담을 적어야했을까.
독자가 원하는 글을 써야한다는 것은 동의하는 바이다. 이제 내 글은 일기장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가끔 어떤 댓글들에 일기는 일기장에, 라고 되어있는 경우도 봤다. 나는 에세이를 쓰는 줄 알았는데 일기였다. 나만 아는 속상한 이야기, 그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 그건 일기장 속에.
브런치나 글쓰기 교실의 글을 쓸 때는 독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써야한다. 트렌드를 읽고 글쓰는 대열에 합류해야하나보다.
나는 일기쓰기 방법이나 찾아가야겠다. 글이 자기정화의 힘이 있다는데, 나는 자기정화를 너무나도 원초적으로 했다. 글은 그런 게 아니었나. 배워가는 중이다. 글이 안 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