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책을 읽고
아는 사람에게 책을 선물해주겠다고 목록을 보내달라고 하니,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를 사 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책을 고르면서 주문해서 배송받아 원래 주인에게 가려는 책을 붙들었다. 책 제목을 보면서 책장을 열고 싶었다. 새 책의 책등에 자국이 나지 않게 조심조심 펼쳐서 읽었다. 선물받을 지인이 내가 읽은 것을 모르도록 하고 싶었지만, 책이 중반을 넘어가자, 활자가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인에게 선물로 먼저 주면서 나도 따로 봐야겠다 싶었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용은 안 읽어도 알 것 같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내용이 교육도서로 교육자들에게 1차 독자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으니까.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십수 년 전 대학에서 교육학을 배울 때 교육과정 중에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개념과, 교육사회학의 ‘인비저블(보이지 않는) 학생’, 이 두 가지가 떠오른다. 두 개념을 배울 때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학습한 것과 교사에게 보이지 않는 학생의 역할을 맡았던 나와, 같은 역할을 맡아야만 했던 학생들이 떠올랐고, 학교의 역할과 학교가 만들어가는 구조를 알고 나서였다. 이 책은 전자인 ‘잠재적 교육과정’을 다룰 것 같아서 관심이 생겼다.
학창시절 내 꿈은 도덕 선생님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구분한다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윤리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윤리 과목을 배우면서 느낀 철학적 삼단논법이 좋아서가 아니라, 윤리 선생님이 좋았고, 철학을 배우는 사람은 뭔지 세상을 알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현자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윤리 선생님이 제일 철들어보였다. 그리고 늘상 해주시는 이야기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질서를 꿰뚫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래서인가, 나는 한자 시간이 좋았다. 논어와 맹자의 가르침을 한자를 통해서 들으면서 우주의 이치를 배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는 자는 강해보인다는 무의식적 신념일지도 모른다. 제목을 보면서 공자인가 맹자인가, 아니 노자인가, 장자인가 기억은 안나지만, ’책에 적힌 것, 스승이 아무리 가르쳐주려해도, 스스로 터득하여 깨우친 것은 가르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문장이 있다.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 해도 검색어 기술이 부족한 것과 논어인지 맹자인지, 공자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정확한 구절을 찾기 어렵다. 교사가 대강의 줄기는 알려줄 수 있어도 미세한 것, 평생에 걸쳐 깨달은 것을 알려주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한 그 구절이 기억난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와 이 책의 제목을 엮어 미뤄 짐작해본다. 이 책은 교사로서 가르침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학생에게 배움은 스스로 찾아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독자는 교사쪽에 무게가 있는 것 같으니, 가르침의 한계로 기울어진다. 나의 추측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읽어야 했다. 솔직히 얼른 읽고 싶었다.
공자를 떠올리며 열심히 검색하다보니 공자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비유한 것이 줄줄이 꿰어 나왔다. 덕분에 배움에 대한 비유를 다시 읽게 되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등이 있었다. 학창시절 한자를 배우며 멋지다는 생각에, 논어에 관심을 갖고 필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이러한 말들을 학교에서 들으며 감탄은 했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검색을 하면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배움이 무용하다고 했던 자로의 이야기였다. 공자는 배움이란 인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학문이 필요없다고 하는 자로에게 자네가 잘하는 것에 학문을 더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따를 자가 없을 거라고 했다. 자로는 학문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말했다. 학문의 효과를 의심하는 자로에게 공자는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진다고 하였다. 자신을 자연상태의 대나무로서도 충분히 무언가를 뚫을 수 있다고 하자, 공자는 푸른 대나무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쇠촉을 달아 날카로이 연마한다면 더 깊이 가죽을 뚫을 수 있다고 하여 자로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는 공자의 너그러운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인재로 거듭난 것이다. 그 때에 자로에게 학문은 무엇이었을까. 출세를 위한 입시합격의 도구가 아니었다. 자신을 인간으로서 완성시켜주는 무언가로 보았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위대한 스승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하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에서 저자는 공자가 언급한 교육에서 중요한 배움의 순기능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번의 시험(오직 대입)으로 자신의 출세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공고해져 감으로써 교육의 순기능은 발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교실에서 방석처럼 공부 잘하는 애들 빛나도록 내신 깔아주는 역할임을 인지하는 학생들과 시험을 포기하면서 공부도 포기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의 모습에 슬픔을 느끼게 하였다. 분명 나 또한 겪어온 교실의 모습이건만, 교육자가 되어 서있는 지금도 학교를 여전히 바꾸지 못하고 지내온 무기력한 과거의 모습 때문에 밀려온 감정.
감정이 보내는 신호는 이 현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교육하는 위치에 서 있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가르침과 배움을 좀더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지내면, 바꾸기 ‘어렵다.’ 공자가 말씀하신대로 배우고(독서)나서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교육철학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책을 읽고, 공자의 명언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교육철학이란, 내가 교육하는 대상(학생)과 그들이 내게 교육을 받은 후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가를 생각하는 것, 이 A와 Z사이의 과정을 어떻게 채워가는지 고민하는 것이 나의 교육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볼까. 공자의 교육대상인 자로는 무예를 잘하고, 거침이 없는 사람, 그러나 공자에게 그 자체로 존중을 받았다. 공자는 그가 태어난 결 그대로이되 더 곧아지고, 더 깊어지는 인재가 되도록 목표를 세웠다. 자로는 스승을 만나기 전, 누군가가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란 자신이 잘 사는 것에 별 일조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공자라는 스승을 만나, 자신이 더 깊어짐을 깨닫고 스승의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학문을 거부하였던 자로였지만, 공자는 결국 배움이 즐거워지는 것으로 이끌어주었다.
나는 교육철학이 무엇인지 공자와 자로를 통해 좀더 쉽게 느꼈다. 저자인 이병곤 스승이 말하는 교육철학, 가르침과 배움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저자가 말하는 배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학생)과 가르치는 사람(교사)의 말들을 들어보고자 하였다.
‘깨지 못한 신화, 시험을 다시 들여다본다’ 편에서는 학생들에게 필요없는 능력 중 시험보는 능력을 학교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디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인문학 캠프를 할 수 있는 비결은 시험을 없앤 덕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타인이 정한 관심사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자신의 속도로 파고들어간다. 두세 명으로 이루어진 모둠이 수개월 동안 학습한 것을 분야별로 발표하며 이야기하게 된다. 그 깊이야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무엇을 배웠을까. 물론 배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시험보는 능력을 키웠고, 나의 사회적 지위의 첫 발걸음을 남들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 능력을 사용했다. 학교에서 받은 교육으로 나를 깊어지게 하기보다는 나의 우월적 위치를 탄탄히 다지는데 썼던 것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나 자신이 깊어지기보다 시험 잘 치는 요령을 알아 교사가 된 나는 학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교육을 했던 것일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민주시민교육이 중요해졌다. 민주주의는 민주시민이 있어야 올바르게 작동한다. 독일의 정치교육 원리 중에 보이텔스바흐 원칙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치성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다른 이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하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깨닫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학생이 나 자신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나를 위한 정치 행동, 정치적 이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로부터 시작한다. 나를 알아야 나의 관심분야를 알게 되고, 나를 알아야 내가 위치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시간에 쫓기는 시험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 동안 자신의 관심사를 찾고, 그것을 서로 토의 토론하며, 깊어져가고 있다.
‘걷기, 가장 자연 상태에 가까운 인간의 행위’에서 저자는 교육자로서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떠밀리다시피하여 자차로 이동하는 대신 자전거나 걷기로 출퇴근을 하기로 하였다. 걸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교사를 닮아가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사가 몸을 움직이기 부담스러워하면 어느덧 아이들도 ’그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꺼려한다고 했다.
학창시절 프로젝트를 해본 적 없고, 사회 참여 프로젝트 수업을 해본 적 없어서 민주시민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로 인해 소로의 시민 불복종, 필경사 바틀비의 ‘안 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를 듣고 읽으며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나, 사회의 책무성을 갖고 나의 권리를 찾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자칫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할 것인가. 나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살았으니, 너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미안하여, 비행기를 타는 것을 그만둘 것인지. 북극곰이 슬퍼 울고 있잖아, 라며 <북금곰아>를 들려주며 지구온난화를 가르치며 나는 자동차로 왕복 수십킬로미터를 나 혼자 타고 달릴 것인지 고민이 되었고, 그로인해 견디다못해 최근에는 자전거를 왕왕 타고,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
지행합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 '교행합일'. 가르치는 것와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 말로 가르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어긋나면 그것은 배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부모의 절약정신을 갖고 살면, 절약하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녀의 몸에 스며들고 그 모습을 싫어했다해도 자신도 모르게 절약하는 습관대로 행동하곤 하는 사람들의 고백이 있다.
초등학생을 기준으로 9시부터 2시 30분까지 학교에서 교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6시간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하루의 사분의 일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이다. 이 시간에 가르친 것보다 6시간 동안 보여준 가르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몸에 새겨진다. 어른의 모습을 배우는 아이들은 교사가 절약하고, 기후 걱정을 하며 실천하는 행동을 보며 어느덧 그 모습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듀이의 행함, 우리의 움직임‘에서 듀이의 행함을 통한 배움이라는 근사한 교육이념의 줄기라 했다. 학교 밖, 이동수업으로 환경 지킴이 역할을 3개월에 걸쳐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천시 남한강 수계에 산업용 쓰레기 매립장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기업이 있음을 알고, 아이들이 당사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발표하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성찰을 하며 돈이 걸려있는 문제에서 사람보다 돈이 우선이었고, 자신들의 편은 낮은 사람들임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무관심과 썰렁함 속에서도 자기의 생각을 쉽게 접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 현장 프로젝트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활동한 아이들을 보는 교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깨달았을까. 이것이 교학상장이구나 싶다.
“예술을 품은 교육으로 판을 바꾸자”에서는 존 듀이의 어록, “미적인 경험 안에서는 지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융합된다”라는 문장이 있다. 통합 예술교육으로 연결하여 아이들에게 예술로써 도전하며 감상자로 키워가자고 했다. 기저에는 예술이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정서를 자극하거나 순화하며 인간의 내적영역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예술 과목들이 등한시되었지만 점점 많은 교사들이 예술에 손을 들어주며, 학교의 철학 풍토도 바꾸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예술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도록, 예술을 통해 감성을 정화하며 살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예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학교는 점차 문예체 수업을 확대하여 아이들의 삶과 정서를 가꾸어가고 있다. 노작교육으로 노동하는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며 아이들을 삶의 배움으로 이끌고 있다. 내가 발담그고 있는 초등에서는 이러한 학교가 늘어나고 있지만, 중등 학교에 가면 확산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정을 잘 모른다.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예술교육 사업을 확산시키고 있다고는 들었고 학생들이 예술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험을 없애고 학생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학교가 아닌 다음에야, 이 기다림을 어떻게 재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교사는 학교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가르침을 구조화하여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교실 현장에서 부대끼며 아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교사이다. 자신의 철학을 토대로 음악감상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고, 입시미술 수준으로 재촉하지 않고,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이들은 예술을 통해 인간다움을 가꿔나갈 것임을.
“대안교육 실천가 페스탈로치를 회상하며”에서 페스탈로치는 ’학교는 민중의 자녀를 키우는 곳으로, 심신을 골고루 발달시키기 위해 생활과 노동을 통해 전인교육을 펼치는 터전‘으로 보았다. 저자는 팬데믹, 기후위기, 기술 대전환 시대에 어떻게 교육기본법 2조의 인격 도야, 자주적 생활능력,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기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교사란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앞서 말했든, 교행합일. 가르치는 것과 내가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보니, 나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기 어려웠다. 기후위기, 기술 대전화신대, 팬데믹 시대에 나는 가르치던 대로만 가르칠 것인가. 실천을 두려워하며 민주시민교육을 이론으로만 가르칠 것인가?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그릇이 있다.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정도, 나는 내 그릇의 크기를 키울 수는 없지만, 큰 그릇을 알아보고, 학생들을 격려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바로 나의 고민이다. 내가 못하기에 섣불리 가르치지 못하지만, 내가 못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찾은 나의 ‘어떻게’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력해보는 것이다. 코치, 조력자는 알고 있다. 학생 각자의 크기를 알고, 그가 될 수 있는 것을 도와주고, 지원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코치가 되어야 할까!
아울러 마지막에는 선의와 자발성에 기초하여 가르치던 교사들의 소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젊은 교사들이 소명의식을 안고 대안학교를 지원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침과 돌봄을 지속하고 있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교사로서의 소명의식도 소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구나. 쉽게 교사의 소명의식을 떠올리는 나 또한 저자가 말한대로 교사들이 각자 운명을 거쳐 오면서 누군가에게 지지와 격려를 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존재였었다. 그러나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이 교사를 소진하게 만든다. 소명에 이끌려 왔지만, 소진하게 되는 것.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대안학교의 힘듦도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막막해졌다. 수많은 아이들이 교육받고 있는 현장에서 교사로서 어떤 힘을 보태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교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옛 배움의 기억을 떠올리며 위대한 스승들을 만났고, 더불어 나의 교육이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나는 어떤 힘을 보태야하는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나의 교육철학을 떠올리고, 교사의 길을 정비하는 시간이었다. (끝)
*이 글은 독후감 쓰기 보고서 활동으로 작성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