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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브 Aug 25. 2023

제주도 자전거 여행길에 오른 이유

2-아픈 내가 더 아픈 너를 안아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막내동생에게 제주도에 자전거 타러가자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뭉칫돈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한데, 적금 탄 것처럼 뭉칫돈이 있었다.


동생은 회사의 근무 조건과 장거리 출퇴근, 등등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실업자로 집에 있었다. 3개월이 지났을까. 그러고 있는 동생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삶이 바닥을 쳤을 때 웅크리고 집에만 있었다. 납작해져서 웅크리고 웅크리다 보면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신호를 보낸다. 찌푸둥하다고, 신선한 공기 좀 달라고. 아마도 몸이 살려달라고 하는 신호인가 싶다. 그런 때에 누군가가 있다면 나았을 텐데 그 당시 나는 독립해서 살아서 옆엔 아무도 없었다. 찌푸둥함을 무시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오면 오만가지 생각으로 괴로웠다.


그때 처음으로 유튜브를 오랜 시간 봤다. 알고리즘 덕에 살아났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이야기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면서.


그러다가 햇빛을 들이고 싶을 때가 생긴다. 살아있는 느낌을 얻기 위해 몸이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걷거나 무념무상 운동하고 몸을 쓰며 땀흘리다 보면 마음 속에 고통으로 차올랐던 것이 차츰 비어져 간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로 변화되어 가는 것 같다. 궁극적 이상은 승화겠고.


내가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제안한 때는 동생이 웅크린지 3개월 정도 된 때였다. 동생은 싫으면 싫다고 하는데 그 날은 약간 머뭇거림이 보였다. 나는 간파했다. 슬쩍 핑계를 댔다. 내가 자전거를 타려는데 혼자는 부담되고, 같이 탈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장비는 내가 다 부담하겠다고. 나의 끈질긴 부탁에 동생은 그래, 라고 했다. 뭉칫돈을 거기에 다 썼다.


나는 동생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막내동생은 남자였다. 나와 둘째는 여자였고. 아버지는 사기를 당하고, 영업정지를 당하여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집에서 술을 마셨다. 어린 자녀들을 데려다놓고 자신의 하소연을 했다. 우리들은 무릎꿇고 각 잡고 앉아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짧게는 한 시간, 몇 시간이고 들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앞에 앉아서 듣는 아이는 막내였다. 남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훈육을 했다. 아버지는 자연히 자녀들에게 부담되는 무서운 가장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고 밥을 먹으며 따뜻하게 대하던 모습, 아버지식 유머가 기억나지만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점점 꼬여가는 일 때문에 가족들이 그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했다.

어린 시절 실수도 하던 그 아이들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자녀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며 혼났다. 어쩔 때는 맞았다. 특히 막내를 제일 많이 괴롭게 했다. 체벌을 더 많이 했다. 어릴 때는 내가 덜 맞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지 막내가 맞는 걸 막아본 적도 없고, 대신 맞아준 적도 없었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머리가 커진 우리를 함부로 체벌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 자녀들을 모두 불러다놓았다.  마지막까지 푸념과 훈계를  들은 막내동생에겐 내가 기억하는 한, 꽤 오래 초등 고학년 때까지도 체벌이 지속되었다.

어릴 때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아니 방관했을 수도 있다. 성인이 되어, 가정사를 떠올리면 막내동생이 그렇게 맞아서 나와 둘째가 덜 혹은 안 맞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했다. 막내동생이 최전선에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차올랐다. 숨이 막혔다. 차마 어린시절 너는 어땠냐고 묻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해줄 수 있는 건 잘해주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 살 길도 바빠서.


지금도 나는 나 하고 싶은 것 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고, 때로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동생이 실업자가 되어 집에 있게 되자 그래, 쉴 때도 있어야지, 하며 걱정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냥 바깥 공기를 쐬지 않는 것이 너무 오래된 거 같아 내 경험을 생각하며 자전거를 타자고 제안을 했다.


제주도 가는 목포애거 새벽 1시에 출발하는 실버클라우드 호를 탔다. 그때 시간이 10시. 자전거 앞에 롤백에 2박3일치 짐을 꾸려 어깨에 메고 접이식 자전거를 낑낑 거리고 계단을 올라가 다인실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침대에 커텐이 쳐져 있어 좋았다. 맥주 한 캔하고 자려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동생에게 고맙다고, 내 로망을 실현시켜 줘서, 내 직장이야기며, 작년에 따릉이 타고 퇴근한 이야기, 연극 무대에서 느낀 이야기 등을 하다가 약간 취해서 혀가 꼬였다. 아, 내가 취해가는구나. 푹잠 자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인간관계 어려움을 이야기하다가, 진짜 힘들고 바닥을 쳤다고. 그런 이야기도 했다. 눈물이 흘러 훌쩍 거렸다.


동생에게 어린 시절에 너도 힘들 때가 있었냐고 물었다.

동생은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전부터 흐르던 눈물이라 동생은 모를 수도 있다. 동생이 어릴 때 본인 이야기를 담담히 했다. 과거형이 된 그 말에 나는 그때 네가 제일 많이 맞았던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 없다고. 더 쉬고 싶다고.

그랴, 괜찮아. 했다. 하고싶은 대로 다 해.


다음 날 둘째에게 전화하여 동생과 배 타고 가면서 진지한 대화 많이했다고 하니, 둘이 여행 가서 말 많이 텄다고 한다. 이어서 막내의 과거 심경을 전하는데 눈물이 솟아올랐다.


나는 막내의 고통을 몰라줬던 누이로서 미안했다. 나도 아팠지만 더 아팠을 동생을 꼭 껴안아주지 못했다. 지금은 안 계신 아버지지만 동생은 부모님을 곁에서 끝까지 지켰고, 나는 밖으로 떠돌았다. 내가 좀더 단단하게 성장했는지 동생이 더 단단하게 컸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유년의 기억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난 종교에 기대고 상담도 받았다. 치유하려고 했다. 동생이, 선한 동생이 겪었던 유년을 떠올리다가도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견하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같이 지내온 누이는 공감할 수 있는 최측근이기도 하다. 가족이 가진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알아주고 함께 나누기 위해 제주도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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