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인뎅
예전에 같이 일 했고, 서로 다른 회사를 다니는 지금도 몇 달에 한 번 보는 친구인 K(1)과 K(2)가 있다. 추운 겨울날 코로나를 뚫어보고 간만에 모인 저녁 자리, 기름을 뚝뚝 흘리며 숯불 위를 굴러가는 양꼬치 앞에서 야심차게 올해는 출간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밝혔다. 출간 목표는 모 시리즈라고 밝히자 그 둘은 딱 저런 답을 돌려줬다. 거 참 평가 야박하다 증말로.
출간은 두어달 쯤 전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책 쇼핑을 하다가 우연히 한 에세이를 발견하고 생긴, 숯불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양꼬치처럼 따끈한 목표였다. 해당 에세이는 다양한 주제로 만들어지는 유명한 시리즈의 책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주제를 잡아서도 에세이를 쓸 수 있구나. 한때 책을 너무 좋아했고, 뭔가 써내려가는 걸 업으로 삼으면서 에세이스트도 꿈꿔봤지만 어떻게 엮어서 만들어 낼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그 에세이는 이런 상황을 한순간에 맑게 정리해줬다. 꼭 머리에 만화처럼 번개가 내려친 것만 같더라니까.
게다가 해당 시리즈엔 상대적으로 책 시장에서 이런 것도 된다고? 싶은 주제도 많았다. 아 이거 꽤 해볼만한 일이다. 껌이지! 집에 가자마자 한밤중에 노트북을 열고 목차를 구성했다. 소재는 내 취미 1번인 프라모델. 휘뚜루마뚜루 목차를 구성하곤 이내 글 하나를 뚝딱 써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글을 굉장히 빨리 쓰는 편인데, 평소보다 더 빠르게 썼다. 약간 그…거북알 아이스크림 아는지? 그 아이스크림은 풍선 같은 껍질(?)에 들어있는데, 녹은 상태로 꼬다리를 잘라낼 경우 분수처럼 쏟아져나온다. 딱 그 꼴이었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이미 네 편 정도를 쓴 상태였다. 친구들은 인상을 가볍게 쓰며 영 안 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1. 그 주제로 2. 유명하지 않은 네가 과연? 이라는 이유였다. 과연 대중문화계에서 일하는 친구들답게 합리적이고 타당한 수요예측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미 꽂혀버린 나에게 그런 잡음은 귓바퀴 언저리에서 튕겨나갈 뿐이었다. 거진 2-3년 만에 느끼는 작업의 설렘 앞엔 많은 것이 무의미했다. 이미 내 노션 페이지에는 목차가 있었고, 커버 이미지가 있었으며, 초고는 네 개나 마련되어 있었다. 심지어 글쓰는 재미를 위해 와디즈에 휴대용 기계식 키보드까지 펀딩을 해놨다.
아마 내 머리 속에선 이런 매커니즘이 돌아갔던 것 같다. ‘이런 마이너한 소재로도 책이 나온다 > 프라모델 정도면 대중적인 취미다 > 이걸(?)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많지 않다 > 나도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다 > 내가 빨리 한다고 하면 되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단계들과 연결고리엔 수많은 구멍이 있었지만, 당시의 나에겐 ‘양꼬치엔 칭따오 ㅇㅇ 당연’ 같은 사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머리 한 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말이나 휴가 땐 카페에 가서 자료가 될만한 책을 읽어보거나 초고를 만들어 채우는 일을 반복했다. 고향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도 (원래 가지고 있었던, 펀딩 종료 이전 시점이라 아직 못 받았다 ㅎ)블루투스 키보드를 붙잡고 글을 써봤다. 아직 출판사에서 해 준다고도 안 했는데, 꼭 하는 행동은 출간 계약을 한 사람 같았다.
워라밸이 훌륭한 회사에 다니면서 글을 꽤 빨리 쓰는 나는 일을 병행하면서 남는 시간을 쓰는 것 만으로도 3~40% 분량의 초고를 빠른 시일 내에 뚝딱 말아냈다. 2만5천자 가량을 쌓았다. ‘됐다. 이 정도면 출판사에 샘플 원고와 기획안을 드디어 보낼 수 있겠다.’ 생각하고 밤 열두시에 워드로 뽑은 기획안 하나와 피디에프로 뽑은 초고 네 벌을 한 데 합쳐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