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주의
막노동보다는 노가다라는 말이 일의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장성에 내려온 뒤 도서관 다니면서 공부는 했지만, 공부를 한 시간이 잉여롭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공부라고 해 봐야 느지막이 10시 쯤 일어나서 동생과 대충 시간 때우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실제로도 잉여질과 별 다를 바 없었다. 가족들은 일 하고 있는데 나만 혼자 편안하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동생도 알바자리가 마땅히 구해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전부터 아빠 지인인 인력사무소 소장한테 간다고 말 좀 해주라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었다. 아마 본인이 현재 일자리가 없는 상황에서 자식들이 일하러 간다는 것이 못내 불편했던 모양이다. 일자리가 잡히고 나서야 체험삼아 노가다 일이 어떤 일인지 하루정도 다녀오라고 허락을 해 주었다. 동생은 노가다를 가면 제일 막내이기 때문에 아저씨들이 시키는 일도 어지간하면 ‘예예’ 하면서 해야 한다고 나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나름 노가다 선배로써의 충고인 셈이다. 그러면서 ‘형은 싸가지가 없어서 싸우고 때려치울지도 모른다.’이새끼가 며 걱정과 장난의 그 중간 어딘가의 느낌으로 혀를 찼다.
7시 이전까지 인력사무소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 5시 반쯤에 일어났다. 씻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먹은 뒤 작업복으로 쓸 만한 허름한 옷들을 주워 입었다. 아침에 일을 나가는 아빠 차를 타고 인력사무소로 향했다. 인력사무소로 가는 차 안에서 이것저것 잡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일찍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구나, 대학교 친구들은 이런 일 해본 적 있을까? 아 군대도 다녀왔는데 이까짓 걸 못할까?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을까? 뭐 이런 걱정들이 들었다. 30분 쯤 지나서 광주 비아에 위치한 <선우인력사무소>에 도착했다.
※ 참고 - 인력사무소 : 인력사무소는 노동력을 제공하러 온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가게. 노동력을 구매하러 온 손님들은 필요인원을 사무소장에게서 사간다. 작업장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장소이며,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이곳으로 돌아와 수수료(만 원)을 제한 일당을 받아간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대기실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다. 3분의 2는 50대 즈음의 아저씨들이었고, 나머지는 흑인들이었다. 안에는 화목난로와 TV, 의자가 있었다. 나란히 앉아서, 혹은 서서 1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홀짝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시골 허름한 역의 대합실 같은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아저씨는 허름한 옷과 등산복을 적절히 조합해서 입고 있었는데, 자주 나오는지 안면이 트인 사람들도 많아보였다. 20대는 나와 동생뿐이었다. 아저씨들의 시끌시끌한 잡담과 외국인들의 이상한 영어가 섞여있는 어색한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어 밖에 나와 있다가 추워서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앉아 있다 보니 인력사무소 소장이 들어왔다. 새까만 얼굴 때문에 아빠는 그를 ‘때보’라고 불렀고, 우리보고는 ‘때보삼촌’ 이라 부르라 했다. 예전에 집이나 다른 식당에서 봤을 때는 그냥 아저씨였는데, 인력사무소에서 보니 달랐다. 이 공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잘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인사도 적극적으로 했다. 동생은 인력사무소 소장이 아빠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오늘 일거리 중에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쉬운 곳으로 보내 줄 것이라 했다. 동생이 먼저 갔고, 나는 10분 쯤 뒤에 모자 쓴 아저씨와 안경 쓴 아저씨와 함께 스타렉스를 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까맣던 하늘이 이내 푸르스름해졌다. 우리를 데리고 온 운전석에 있던 아저씨는 나를 ‘젊은 친구 야호 ’ 라고 불렀다. “아저씨들은 미장일 좀 해주면 되고, 거기 젊은 친구는 청소하면 돼” 모자 아저씨는 이미 가 본 일자리인지 아는 눈치였다. 얼추 30분 쯤 이동한 뒤에 작업장에 도착했다.
완공되는 3월쯤에는 교문으로 쓰일 작업장 입구에는 드럼통에 각목 쪼가리 등의 건축 잔해들이 불타고 있었다. 몇몇은 불을 쬐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이미 작업을 시작 했다. (이 때는 구분하지 못했었는데, 한 작업장에 있다고 한 팀은 아니다. 정원/나무 등을 담당하는 조경 팀이 따로 있었고, 일하는 이들은 조경 팀이었다.) 5분 쯤 불을 쬐고 사무실에 들어가 목장갑을 챙긴 후 일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맡은 일은 작업장에 흩어져 있는 보도블록 조각들을 모아서 밖에 있는 폐기물 마대자루에 모아두는 것이었다.
욕먹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지런히 움직였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삽으로 조각들을 퍼 담았다. 두어 번 정도 퍼 담고, 더 담을게 보이지 않았을 때 화장실을 다녀왔다.(화장실의 비주얼은 충격적이었다. 임시로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인데, 구더기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문조차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다녀오고 나서는 보도블록 틈에 모래를 채우면서 쓸어내는 빗자루 질을 맡았다. 아까는 일을 한참 하느라 못 봤는데, 동생이 빗자루 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같은 곳으로 오게 된 모양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형제가 보는 앞에서 욕이라도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잠깐 빗자루 질을 하다가 페인트칠을 위해 창고(계단 아래쪽 공간에 작업 도구들을 모아놓은 곳) 의 물건들을 떼어놓는 일을 했다. 계단에 올라가서 비닐을 뜯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욕이 들렸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두건을 쓴 아저씨가 있었다. 두건 아저씨는 미장일을 하는 안경 아저씨를 보면서 욕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씨발’은 첨가물 수준이라 생각되는 말들이 섞여 있었다. 욕이 반이 넘는 말은 이 일을 대체 언제까지 할 생각이며, 이래가지고 언제 마무리를 하겠냐는 내용이었다. 아까 우리를 데려왔던 반장이 끼어들어 말렸지만, 안경은 미장도구를 팽개쳐두고 전화를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더 해야 할 일이 없는지 물어가면서 일을 했다.
두건은 삽과 빗자루를 챙겨서 건물 뒤편으로 사람들을 오라고 했다. 그는 현장 내의 1차적인 책임자인 것 같았다. 건물 내의 길이 현재는 흙과 건축 잔해들로 더러워져 있는데, 아스팔트를 깔아야 하니 이것을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작업 진행 내용을 사진을 찍어서 보여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건물 뒤편부터 화단이 경계석으로 구분이 되어 있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1차 포장 되어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경계석과 바닥의 흙을 깔끔하게 각삽(머리가 뾰족한 날삽과 달리 네모지게 생긴 삽)으로 긁어내는 것이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날이 추운 탓에 흙이 물과 섞여 얼어있었고, 삽을 꽉 잡고 바닥의 껍질을 벗겨낸다는 느낌으로 쳐야 겨우 흙이 얄팍하게 깎여 나갔다. 힘들고 허리도 아픈데 두건이 보고 있는 탓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아득했다. 이래가지고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겠나 싶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봐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겉옷과 껴입은 후드 하나를 벗어서 문틀에 걸어놓고 계속 삽질을 했다.
삽질을 얼마간 하다보니 양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양지는 그나마 흙이 녹기 시작해서 일이 수월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허리도 아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삽질뿐이었다. 양지로 넘어온 지 30분 쯤 되었을까? 아저씨들이 참을 먹자며 불렀다. 진라면 컵 네 개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목장갑을 바닥에 깔고 허리를 바로 하고 걸터 앉아있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와서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먹어 두었다. 시간이 몇 시 쯤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동생이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하다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여기가 마무리 단계라 일이 쉬운 편이라며, 벽돌 나르기였으면 ‘형은 아마 뒤졌을' 거라고 했다.
두건은 너희들 일 잘한다면서 내일도 오라고 말했다. 보통 젊은 애들이 일도 제대로 못하고 농땡이만 피우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였다. 오기 전에는 이틀 해야지 마음먹었는데, 몇 시간 하고 나니 이걸 내일 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 일하고 9만 원이면 할 만 하지 싶어서 살짝 머뭇거리다가 하루 더 온다고 했다. 먹기 시작한 지 5분 쯤 되었을까, 사람들이 먹고 슬슬 일어났다.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다시 삽을 들었다. 현장 분위기에 약간 적응이 되어서 물을 마시러 다녀왔다. ‘모든 음료수를 가져다 줘도 이 시원한 물맛만 못할 거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이 떠올랐다. 세 잔쯤 연거푸 마셨다.
이후로는 계속 삽질을 했다. 허리가 몹시 아팠다. 허리를 펴는 빈도가 늘었다. 두건이 보고 있는지 아닌지 슬쩍 보는 눈치도 생겨서 틈틈이 물도 마시러 갔다. 정말 열심히, 오랫동안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가운데에 걸리지 않았다. 열한시쯤 되었던 것 같다. 경계석이 길 양쪽에 있는데, 양 쪽 모두의 흙을 긁어내고 경계석 바로 옆의 흙을 길 가운데로 모으는 것까지 하고나서 빗자루를 잡자 점심시간이 왔다.
빗자루를 한 쪽에 팽개쳐 두고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로 갔다. 포클레인 기사, 반장, 두건, 모자, 특징 없음 이렇게 5명이 있었다. 닭도리탕과 젓갈, 무침, 전, 소시지 등 각종 반찬 류와 된장국, 공깃밥이 있었다. 밥을 먹다가 또 두건 아저씨가 내일 오라고 이야기를 했다. 군대 다녀온 남자애들이 눈치 보면서 일을 열심히 하기에 자꾸 오라고 하는 것 같다. 몸을 많이 쓴 뒤인데도 의외로 입맛이 없었다. 된장국에 적당히 말아서 오징어젓을 얹어 한 그릇을 먹었다. 한 그릇 더 먹으라고 권해줬는데 배부르다며 거절했다. 나가서 앉아있을까 하다가, 밥을 다 먹으면 잔반도 정리하고 뒷정리를 해야 하기에 좀 더 앉아있었다.
뒷정리까지 하고 아까 걸어두었던 옷을 챙겨서 타고 온 차에 넣었다. 날도 좋아서 어차피 입을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전화 한 통, 카톡 한 두 개 정도 하고 동생이랑 볕을 쬐며 이야기를 했다. 밥을 많이 먹어야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반 그릇정도는 더 먹어줘야 한다고 알려줬다. 아까 오늘의 난이도를 ‘하’로 설정했던 동생은 ‘중에서 중하’ 정도로 난이도를 조정했다.
동생은 여기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안면이 있었다. 지난 가을에 알바를 잠깐 했을 때 본 사람들이란다. 반장은 소령출신의 퇴역군인인데 이것저것 자잘한 일들을 시키는 게 버릇이 되어있는지 조금 짜증난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나간 안경 아저씨는 나쁘진 않은데 약간 ‘애’같은 면이 있다고 했다. 그거 조금 참으면 일당 버는 건데, 그걸 못 참는다고 말했다. 아까 같이 온 모자 아저씨도 동생과 비슷한 말을 했다.
십오 분쯤 앉아서 쉬었을까? 두건이 일을 시켰다. 보통 밥 먹고 한 시간 정도는 쉬는데 이곳은 안 그런 것 같았다. 아까 밥 먹을 때도 빨리 일 마무리한 뒤 집에 가자고 말했는데, 휴식시간을 줄여보려는 모양이다.
오후에는 포클레인이 바닥을 긁어서 흙을 치우고, 서너 명이 빗자루로 포클레인의 보조를 맞추었다. 이놈(반장)이랑 저놈(포클레인)이 시키는 내용이 엇갈려서 짜증이 났지만, 이내 조정이 되었다. 두건은 또 와서 나를 칭찬했다. 빗자루 질 많이 해 본 것 같다며, 군 생활 어디서 했냐는 시답잖은 질문을 했다. 칭찬한다고 더 열심히 할리도 없건만 뭐하러 칭찬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무튼 30분에서 한 시간쯤 했을까, 두건 아저씨가 나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주었다.
건물 뒤편에 보도블록에 모래를 채워 넣으면서 쭉 쓸어오라고 했다. 그늘이고, 혼자 일하는 것이라 훨씬 수월했다. 보도블록 위의 모래를 쓸면서 틈 사이사이에 모래를 채웠다. 처음에는 아예 빈칸이 없게 하려고 손으로 꼼꼼히 하다가 갈 길이 멀어서 대충대충 발로 문지르면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 보니 화단에서 떼(잔디 한 덩어리) 를 입히던 조경 팀의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쉬엄쉬엄 하라고 했다. 알바 왔냐고 묻기에 하루 정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답했다.‘내 조카도 아직 졸업 안하고 취직 공부한다.’며, ‘노가다 하다보면 계속하게 되니까 이런 일 하지 말고 취업하라.’고 충고 해 주었다. 아빠가 포클레인 운전한다고 하니까‘돈도 잘 벌고 좋겠다.’며 그럼 그 기술이나 배워보라고 했다. 요즘에 대학 나와도 별 볼일 없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취직은 어지간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도 기술을 배우라고 하기에 ‘연세대 다닌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심 ‘아저씨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서 말을 뱉은 뒤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 아저씨는 꿋꿋하게 연세대 뭐 별거 있냐며 포클레인을 추천해 주었다.
뒤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또 참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이번엔 도넛과 음료수였다. 슈가파우더가 뿌려진 잼 도넛이라니,던킨같은거 아닙니다.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긴, 이건 그냥 별 다를 바 없는 빵이긴 했다. 각자 하나 두 개씩 집어서 콜라와 함께 먹었다.
먹고 나서는 포클레인에 보조로 붙어서 일을 했다. 포클레인이 바닥을 긁으면 미처 치우지 못한 흙을 빗자루로 쓸어서 한 곳에 모으는 작업의 반복이었다. 오전보다 한결 쉬웠다. 굳어있던 몸도 적응이 되었는지 할 만하다고 느꼈다. 5시 쯤 작업을 마무리하기 전에 문까지 치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두건이 밀어붙여서 어찌어찌 치우긴 했다. 동생은 일이 너무 많고 쉬는 시간도 적다며 난이도를‘중상에서 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얼추 일이 마무리 되고 쇠파이프를 단단하게 묶어 1.5톤짜리 트럭에 실어서 보냈다. 쇠파이프 몇 개를 철사로 한 데 묶는 것도 스킬이 필요한지 두건이 직접 했다. 트럭보다 훨씬 긴 파이프를 트럭에 고정시켜야 했는데, 다른 일꾼들은 이게 스킬이 필요한 일이라고 배우겠다며 구경했다. 다만 이건 두건도 못하는 일이었던지, 혼자 몇 번 끙끙대다 실패했다. 결국 트럭을 몰고 온 아저씨가 굉장히 능숙한 솜씨로 노끈을 이용해 단단하게 쇠파이프를 고정시켰다. 이게 보기에는 위태로워보여도 절대 흘러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모자 아저씨는 이걸 구경하면서 같이 온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조경 팀의 아저씨와 비슷한 이야기였다. 노가다가 일도 힘들고, 자식뻘인 현장소장 등에게 욕도 먹어서 좋지 않다고, 너는 이런 일 하지 말라고 말했다.(본인은 농사를 쉬는 겨울철에 기름 값이라도 벌려고 나왔다고 했다) 경찰이 좋은 것 같다며 시험이나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경찰은 관심이 없다니까 그럼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냐고 물었다. 요즘 면사무소 이런데서만 일해도 참 좋다면서 역시 사람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곳’에서 일해야 한다 했다. 아빠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공무원도 관심이 없고 기자가 되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다니까 참 대단하다며 공부 한 번 열심히 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고 타고 왔던 차에 몸을 실었다. '아!드디어 끝났다.' 핸드폰을 만지면서 시트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오후를 만끽하며 돌아왔다. 다시 <선우인력사무소>에 돌아와서 사무실에 들러 돈을 받았다. 일당 10만원에서 수수료 만 원을 땐 9만원이었다. 5만 원짜리 한 장과 1만 원짜리 4장. 하루 일한 것 치고는 큰돈이다. 들어보니 반장이나 두건은 돈을 더 받아가는 모양이었다. 숙련도를 쳐 주는 모양인데, 이 사회는 어디를 가나 일 조금하는 놈들이 돈을 더 벌고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제일 적게 받는구나 싶었다. 1만 원 떼어 가는 것이 조금 아깝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인력사무소에서 가만히 앉아서 일은 하나도 안하고 수수료만 받아먹지 않는가. 오늘 20-30명 정도가 있었는데 몇 당 만 원만 계산해도 꽤 나오겠다 싶었다. 물론 이것도 다 인맥이 있어야 하는 일이니 그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야 하겠다만.
일을 하루 더 하겠다는 포부는 전날 돌아오는 길에 강제로 접혔다. 비가 오면 일거리가 별로 없는데, 그러면 원래 오던 사람들이 가야해서 나 같은 아이들 알바 자리는 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일을 힘들게 했으니 내일은 ‘꿀을 빨’수 있을 줄 알고 돈을 벌 기대에 차있었는데 다소 좌절했다. 물론 비가 아니더라도 다음 날이 되니 몸이 성한 상태가 아니어서 못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집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챙겨먹었다. 하루 종일 삽과 빗자루를 꽉 잡고 있어서 젓가락질을 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밥값은 했다는 약간의 뿌듯함이 기분 좋았지만,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나서 자리에 누우니 온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노가다로 삶을 유지하는 것에는 불안한 요소가 많다. 경기가 안 좋아도 일이 없고, 비라도 오면 있던 일자리도 사라진다. 몸이 아프면 당연히 일을 나갈 수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해도 당장 ‘내 자리’가 없으면 인력사무소에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불안함을 극복하고 일을 하러 나가도 육체적/정신적 고됨을 버텨내야 하는 현장이 있다. 여기서라도 좀 더 인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침에 인격적인 모욕을 받고 나가버렸던 안경 아저씨 같은 사례가 흔하다.(그래도 먹고 살아야하니까 모멸감을 참고 내일 또 나왔어야 할 것이다.) 노동에 있어서 조금 더 휴식시간이 체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하루의 작업량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작업량에 하루의 계획량을 맞춰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이 정도로 쾌적한(?) 노동환경이 조성될 것 같지는 않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사회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의 주요 구성원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 위주로 돌아간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슈가 되는 비정규직 투쟁이 간헐적으로 벌어지는데 이마저도 모자라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오늘 하루’의 일자리를 이어가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노동당이나 민주노총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광장, 촛불, 시위, 조끼, 투쟁 등의 이미지로 점철된 정치는 취약노동자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노조나 운동을 배부른 이야기로 여기는 이들은 파편화 되어있고, 정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들이 실생활에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정치는 ‘연줄’이라는 형태를 가진 것뿐이다. 하다못해 시골의 군에서도 군수 자리를 놓고 이권이 촘촘하게 엮여 들어간다. 철수가 군수가 되면 앞으로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영희가 시장이 되면 사업을 하나 따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아는 사람과 또 그 사람의 아는 사람을 거쳐 당장에 일거리가 생기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을 통해 막혔던 곳이 트이는 인생이라니! 정치가 삶을 바꿔주는 생동감 있는 예시 앞에서 투표용지만큼 무력한 것이 없다.
(굳이 정치가 아니더라도)이런 연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변화하지 않는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다. 열심히 해서 조금 더 나은 직장을 얻는 것.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 필요한 것이라도 마련해 주는 것, 어쩌다 가까운 곳이라도 놀러갈 수 있는 여유 있는 삶, 열심히 벌어서 오늘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일. 이 모든 것은 내가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력은 한계가 있다. 사람은 살면서 형성된 시각에 따라 미래를 꿈꿀 수 있는데, 경제적 배경은 이 시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 시각은 노력을 어디로 쏟을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결정하며, 성공은 노력의 양 보다는 방향에 영향을 받는다.
건설 현장에는 정치도, 노력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삶이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책상에서 일하는 삶’ 이 꿈의 최대치인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희망은 자식에게 유보한 채 세대를 거치는 개선을 희망한다.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은 요원하다. 숨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