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iem
많은 돈을 쌓아놓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돈을 아껴 모아서 집을 사야 할 일도 없다. 꼴 보기 싫은 상사가 있는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앉으나 서나 자식 걱정 같은 것도 안 해도 된다. 자식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오히려 나를 걱정할지도 모르는데, 자식들이 걱정한다는 것은 엄마로서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전화도 잘 안 한다. 엄마는 항상 씩씩하게 잘 산다는 메시지를 준다. 남편 저녁밥상에 뭘 올릴지 메뉴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지금 나는 팔자가 늘어진 최고의 인생 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후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나 싶다. 아니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공부나 시험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이니, 지금이 더 나은 시절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롯이 나의 생각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도 되는 인간으로서 누구도 부럽지 않고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그야말로 황금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P.28
일주일에 세 번 요가를 가고 한 번은 친구들과 산에 가고 일요일엔 헬스장에 간다. 게다가 매일 목욕탕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니 남을 시간도 없다. 사람들이 할머니가 되면 할 일이 없어 주리를 틀어댈 거라고 자기들 멋대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식들은 지 자식을 갖다 맡기고도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고(오히려 소일거리를 줘서 다행이지? 하는 태도다), 손주는 봐주는 게 당연하다고 저희 편할 대로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요즘 할머니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루틴이 있고, 나이 들어도 새로 배우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다.
P.34
그냥 나도 생각난 김에 한마디 하자면, 나는 내가 인생에서 해야 할 숙제는 다 했고(남편의 장례식을 끝낸 것, 뒷정리를 다한 것이 나의 제일 큰 숙제였다) 이제까지 대충 즐겁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너희도 너무 애쓰지 말고 대충(이것이 중요하다) 살고, 쾌락을 좇는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뭔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이것부터 해결하는 방법으로 살면 소소하게 행복할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건강을 잃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한 종목의 운동을 늙어서까지 꾸준히 할 것이며 너무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도록 해라. 다행히도 재신이 많지 않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아들딸 며느리 손자 손녀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했고, 너희는 내가 지금도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다. 나의 장례는 그 시기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며 화장해서 유골은 너희 아빠를 장사 지낸 것처럼 하고, 제사는 지내지 말고 그날 시간이 나면 너희끼리 좋은 장소에 모여서 맛있는 밥을 먹도록 해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너희 아빠는 꽃 피는 봄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단품 드는 가을에 떠나면 좋겠네. 그러면 너희는 봄가을 좋은 계절에 만날 수 있을 테니. 끝.
P.73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거침없고 씩씩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또한 남녀 불평등의 산 증거인 남편을 쳐부술 수 있는 용감한 전사였다. 그러나 엄마가 되고 나니 사회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한없이 비겁해져서 남편의 부당한 처신도 감싸 안고 내 바운더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만 강해져 갔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다. 내 아이는 데모에 참가하지 말았으면, 내 아이는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내 아이가 물에 빠진 남의 아이를 구해내려는 의로운 마음을 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다가 내 아이가 불이익을 받게 되거나 위험 상화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다른 엄마들보다 더 비겁한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아이들이 순한 삶을 살기를 바랐고, 특별히 잘난 존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냥 남들 사는 정도의 수준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그들의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원대한 꿈을 키우라든지 뭔가 주목받는 일을 해내라고 주문해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의 인생이 피곤해질 일은 두 팔 벌리고 나서서 막아서고 싶었다. 그런다고 그들의 인생이 어찌 순탄하게만 지나가겠냐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P.111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다 평온하고 별일 없이 살 수는 없다. 이 정도의 소소한 불편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사는 집에 수해나 화재가 나거나 아니면 교통사고가 크게 나거나 갑자기 심각한 질병의 선고를 듣거나 하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러니까 심란하거나 난감하거나 왕짜증이 나는 정도는 어쨌든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는 좀 불편한 일들에 불과한 것이다. 전 지구적 대책 없는 큰일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이 정도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싶다. 제발 기후위기나 자연재해, 대형 산불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이어지길 기원한다.
P.235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무렵 자신의 주인공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로 유머, 친절함, 자기 억제를 들었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라는 거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모순, 자아, 공포 따위는 쓰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인간으로서 자기는 부정적인 요서는 잠시 접어두고, 유머와 친절함, 자기 억제라는 덕목으로 가볍게 날아올라보는 건 어떨까?
심각한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98세에 타계한 중국의 서한 지셴린 선생이 95세에 펴낸 에세이 <다 지나간다>라는 책이 있다. 제목은 도연명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선생은 인류의 체인에서 내가 할 일은 고리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거라 했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 곰곰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갈 것들이다.
그러니까 인간끼리의 관계를 너무 심각해하지 말고 가뿐하게 생각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다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