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래봐야 우린 겨우 삼십오 차이야"
어떤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이는 분명히 답했다.
아마도 내가 아이에게 부탁 또는 당부를 했을 것이고, 아이는 그게 싫었나보다.
나는 아이의 말을 잠시 생각했다.
'겨우 삼십오 차이'라고 했지만, 그 '겨우'는 끝내 극복되지 않을 것이기에.
35는 아이와 나의 나이 차이다.
겨우, 35일 뿐이지만 서로의 삶이 지속되는 동안 절대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숫자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들, 삼십오 차이는 쉽게 극복되지도 않을 뿐더러 어쩌면 아들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숫자일지 몰라"
하지만 아이는 지지 않고 바로 받아친다.
"아니지. 내가 신한테 얘기해서 아빠 나이는 멈추고 나만 나이를 먹으면 되지"
귀엽긴 하지만, 어이도 없다.
"아들, 아빠도 지금 나이에서 나이를 안 먹으면 정말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일 년이 지나면 한 살 더 먹게 되는 거야. 그게 쉽지만 또 어려운 삶의 이치야. 아들도 조금 더 어른이 되면 아빠가 지금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다 문득, 몇 해 전 11월에 삶을 다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아이의 표현을 빌리면 나와는 '삼십이 차이'가 나는 나의 아버지.
아이가 '겨우'라고 표현했던 나이 차가 '2'가 더 적게 난다. 더 가깝다.
나도 내가 아이에게 말한 것처럼 그게, 그 차이가 꽤나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 간격이 좁혀져 다다를 수 있는 건, 어느 한쪽이 멈췄을 때야 가능했다. 이제 아이의 할아버지, 그러니 내 아버지는 숫자 75에 멈춰 있고 나만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렇게 '겨우, 삼십이 차이'가 '삼십일 차이'가 됐고, 내년이면 다시 '삼십 차이'가 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겨우'라는 단어조차 쓸 수 없는 날이 오겠다. 내가 75라는 숫자에 닿으면.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의 할아버지가 삶을 다한 날이 갑작스레 왔듯, 내가 삶을 다할 날도 언젠가는 오겠다.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했던 숫자들도, 끝내는 닿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숫자들도, 그 의미는 조금씩 변해 갔고, 조금씩 변해 간다.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마주하는 숫자들은 더욱 그렇겠다.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마주하는 상황들도.
더 열심히, 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더 당당하게 아버지 나이와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