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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디 Sep 03. 2020

U street

마지막 출근날 찍은 필름 사진 사진


도시를 파악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도시의 지도를 보는 거다. D.C.의 지도를 보면 도시를 어떤 모양으로 설계했는지, 도시가 중시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뚜벅이 길치도 D.C.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거리(street&avenue)에 이름을 붙인 정교한 네이밍 시스템 덕분이었다.



D.C.의 거리는 national mall과 capitol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나눈 뒤, 순서대로 알파벳과 숫자를 붙이는 방법으로 설계돼있다. 알파벳과 숫자만으로 이 도시에서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다니 얼마나 효율적이고 실용적인가! 이런 D.C.의 거리를 친구들과 걷다 보면 재밌는 궁금증이 쏟아진다. J street은 왜 없는지, 왜 그렇게 동그라미(circle)와 네모(square)들이 많은지,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삼각형 모양의 공원은 어떻게 생겨난건지. 


가끔은 이런 알파벳과 숫자 시스템을 따르지 않는 거리도 튀어나온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듯, roadway는 캘리포니아주와 오하이오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Woodrow Wilson Bridge나 Jefferson Davis Highway처럼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장 높은 곳에 국회의사당이 있고, 국회의사당을 지나면 백악관이 있으며, D.C.의 어디에서든 워싱턴 모뉴멘트를 볼 수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 등 아픈 역사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참 재밌는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서울에서 버스를 탈 때 들리지 않던 정류장 이름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댁 앞 할아버지랑 운동을 하곤 했던 효창공원엔 윤봉길 의사 묘역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고, 통학길에 매일같이 지나치는 명동성당 근처에는 안중근 활동 터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일 년 동안 우리 집 마당처럼 뛰어놀던 서울역사박물관이 김구 선생이 생전에 사용한 집무실이자 암살당한 장소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소향이가 미국은 왜 거리마다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짓느냐고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처음엔 왜 그럴까 하며 웃고 넘겼지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도 세종대로, 퇴계로, 정조로처럼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거리에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거리가 역사의 현장이었다니. 교과서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많은 독립운동가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결심을 떠올리면 저절로 경건해진다. 버스정류장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겠지?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거리의 이름을 들으며 역사를 생각하겠지? 젠트리피케이션처럼 자본 뒤로 오래된 거리가 사라지고, 독립운동가 등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요즘 서울 곳곳에서 만나는 역사의 흔적이 더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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