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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디 Sep 03. 2020

무지의 베일


좋은 동네에는 좋은 사람만 가득하다. 치안이 안 좋은 지역보다 범죄도 덜 발생하는데, 경찰은 훨씬 더 많이 배치된다. 교육 수준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대외활동에서, 학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고민하고, 행동했다. 이 친구들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관해 이야기 하다 보면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속의 세상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세상일을 함께 고민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좋은 가정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치열한 사회에서 경쟁을 할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었다. 이런 친구들이 인권, 정의, 환경 같은 가치를 외치면 더 멋지고 뭔가 있어 보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듯. 그러나 불평등이나 재분배 같은 문제는 은근히 뒤로 밀려났다. 진짜 불평등을 받는 친구는 우리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대학에 가지 않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 친구 중엔 정의나 정치가 우선이 아닌 친구들도 많았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이 결정돼 있다. 부모, 재산, 가정환경, 유전자 등은 바꿀 수 없다.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믿음이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합리화한다. 사실, 노력을 할 수 있는 능력, 자기조절능력도 타고나는 건데도 말이다. 노력이면 다 된다는 말은 처음부터 같은 조건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참 잔인한 말이다.  


내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태어날지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엄청나게 부자일 수도, 매우 좋은 두뇌를 가졌을 수도, 누구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을 수도 있다. 장애인, 난민, 홈리스,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윗동네에 태어났다면 내 나라가 북한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복지 정책을 만든다면, 내가 가장 밑바닥 인생에 이르러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이렇게 무지의 베일 속에 있을 때 진정으로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촛불을 들었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어느 지점에서 정의롭지 않다고 느꼈을까. 대학 입시라는 게임에서 조국의 딸이 반칙을 해서? 가까스로 올라선 유리바닥이 위태해질까 봐? 조국의 딸을 상대할 깜냥이 있는 대학생이 더 많이 분노했다. 조국 수호 vs  조국 사퇴로 명백하게 갈라진 진영싸움에 애초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슬프지만, 분노하는 데도 격이 필요했다. 조국 문제는 진보 보수의 공정의 문제로 포장 됐지만 울타리 속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권력은 같이 움직인다. 그래서 기득권인 조국이 재산 비례 벌금제를 추진하고, 공정 사다리를 외칠 때 사람들은 더 환호했고, 인턴 품앗이를 하고, 사모펀드로 이득을 봤을 때 더 분노했다. 그런데 내가 느낀 분노는 조국이 울타리 속 게임 속에서 치트키를 썼기 때문인지,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외면해서인지 돌아본다. 진정한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거다. 페어플레이도 중요하지만덜 가진 사람도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 어드밴티지를 주어 그들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먼저다. 제대로 혈구지도를 하기위해선 무지의 베일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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