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로 걷는 길은

『집을 나선 여자들』 , 최정은

by 착한별

아이 낳기 전의 나는 '러시아어 통번역사'로 15년 가까이 살았다. 중간에 잠깐 몇 년은 '작사가'가 되고 싶어서 공부한 적이 있었지만 대학 졸업 후에 내가 주로 한 일은 크고 작은 회사들에서의 러시아어 통번역이었다. 면접 보고 안 된 적이 거의 없고 퇴사와 동시에 다른 회사로 출근한 적이 대부분이라서 백수 생활을 길게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사회생활에 대한 미련은 1도 없었다. 20대 후반~30대 초에 엄마가 되었다면 사회생활을 충분히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서 일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 4학년 2학기때부터 시작해서 30대 중반까지 찐-한 사회생활을 한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은 상태였다. 그래서 육아를 해도 육아가 '쉼'이었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부터는 이제 나도 뭔가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던 와중에, 운명처럼 그림책을 만났고 아이가 네 살이던 2019년에 '그림책 세계'에 처음 들어왔다.



이번 주에 최정은 작가의 세 번째 에세이 『집을 나선 여자들』 을 읽었다. 작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스스로에게 '지금은 안 돼'라고 셀 수 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전업맘은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집을 나서고 싶은 여자들'이다. 먼저 '집을 나선' 선배인 작가는 자신만의 고유의 길을 찾아 걸어온 이야기를 스물한 권의 그림책과 함께 풀어냈다. 망설이고 주춤하고 흔들리고 넘어지고 때로는 숨기도 했던 이야기는 어떻게 다시 나의 길을 찾았는지 보여준다. 아직 집을 나설 수 없는, 언제라도 나서고 싶은, 혹은 지금 막 집을 나선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ON 문장: 다시 나로 걷는 길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집을 나선 여자들』 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다시 나로 걷는 길이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 와닿았다. 그 길은 스스로 발견하며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도 목소리 높여 내가 나를 응원하며 걷는 길이라는 것도 깊이 동감한다. '집을 나선 여자들'의 '나선'은 '나로 바로 선'이라는 뜻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책이 더 알고 싶어서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여러 자격증을 땄다. 금방이라도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몇 번 강의와 수업을 해보고 나니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10년, 20년 강사를 했던 사람들이 보내는 '넌 뭔데?'라는 시선에 바로 기가 죽었다. 독서학이나 아동문학을 전공한 것도 강사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민간 자격증 몇 개로 뭘 하려는 거냐는 말로 들렸다. 어쩌면 내가 느낀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육용 출판 그림책 만들기 수업도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잘 못 그리는데 내가 뭘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접었다.

지금의 나라면 "저는 다른 분야에서 일한 경험들로 그림책을 색다른 시선으로 잘 읽어낼 수 있고 그림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커서 수업도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텐데. "그림은 배운 적 없지만 그림책 그림은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창의적이고 기획력이 있어서 기관 수업용 그림책 만들기를 잘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십 년 안에는 제대로 된 그림책 한 권을 내는 게 꿈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하고 그냥 안 하는 걸로 결정했었다. 물론 아이가 초등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시간 여유가 없기도 했다.




강사도, 그림책 작가 되는 일도 지금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책, 동화책,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의 책은 꾸준히 받아서 서평을 썼다. 그러다가 그림책 모임 <동행>에 들어가게 돼서 2년 반 정도 참여하면서 글을 썼다. 내년 초에 책이 나온다. 나의 첫 책이다.


『집을 나선 여자들』 을 쓴 작가처럼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생기는 자투리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다시 나의 길을 찾아서 나로 바로 서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작가가 먼저 되고 내 책으로 강사를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 집을 나설 시간이 생길 테니 지금을 준비의 시간으로 삼으려고 한다. 요즘은 동시도 궁금하고. 사실 모든 장르의 글을 다 써보고 싶다. 장르 구분 없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기회가 닿는 대로 수업도 들을 계획이다.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설' 준비로 바쁘다. 읽고 쓰는 일을 놓지 않는다.


아침에 문학동네어린이 인별그램 피드에서 사사주아6 양슬기 시인 편이 업데이트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최근에 <사회의 쓴맛> 동시집을 샀기에 궁금해서 들어보았다.

[아무 데나 핀 민들레 한 송이의 키가 얼마나 큰지] 부분이 나오는 <백날삽질> 동시를 듣다가, 그림책 <민들레는 민들레><틈만 나면> 이 생각났다. 민들레를 소재로 한 그림책이 더 있지만 이 두 책이 그림책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민들레 책이 아닐까 싶다. <민들레는 민들레>가 '있는 그대로의 나',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담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틈만 나면>은 민들레의 '행동'을 포착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틈만 나면>은 마지막 장면에서 민들레 뿌리까지 보여준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 성장 중인 민들레다.

양슬기 시인은 이 민들레를 알아보는 어린이를 등장시킨 동시를 썼다. '민들레 한 송이의 키'라는 표현이 멋지다. 아무 데나 핀 것 같지만 겉으로는 힘없고 작아 보이지만 땅속 깊이 뿌리내린 민들레는 절대로 작지 않다. 백날 삽질하는 어린이의 마음이 얼마나 큰 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림책들과 동시집을 놓고 한참을 보다가, 나도 지금 민들레처럼 뿌리내리며 성장하고 있는 중이란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누군가 보기엔 '삽질'같아도 나의 길을 찾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ON 문장: 다시 나로 걷는 길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길이 아니다.
OWN 문장: 다시 나로 걷기 위해 오늘도 나에게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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